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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편지](18) 정이현 - 보고 싶은 채팅방 친구들

정이현 | 소설가

 

 

 

안녕, 친구들. 지금이 몇년도인지 때때로 실감나지 않아. 얼마 전, 새로 나온 책에 저자 서명을 할 일이 있었거든. 이름 밑에 습관적으로 날짜를 쓰다말고 갑자기 손이 얼어붙었어. 조금 전 내가 휘갈긴 그 아라비아숫자들을 멍하니 들여다봤지. 그래. 참 멀리 왔구나 싶더라. 이상하기도 하지. ‘멀리’라고 생각할 때 그 기준점이 되는 시간은 언제나 1994년과 1995년, 1996년 그 언저리야.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우리들이 알게 된 건 1994년 여름이었어. 참으로 무더웠던 그해 여름을 어젠 듯 또렷이 기억해. 얼굴을 보기 전에 이미 서로의 PC통신 ID에 익숙한 사이였지. 채팅방에서 처음 만났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무렵이야. 그런 식으로 ‘가볍게’ 만나서 상대방에 대해 어떻게 ‘제대로’ 알겠느냐고 혀를 차던 분도 보았다. 요즘 젊은 아이들은 표피적인 인간관계밖에 맺지 못해 큰일이라면서 마치 내가 전국의 20대 대표라도 되는 양 나무라시더라.

 

좀 억울한 기분이 들었어. 그렇지만 눈을 똑바로 뜨고 내 의견을 말하지는 못했어. 부당해도 나보다 연배가 높은 어른 앞에서는 무조건 참아야 하는 줄 알았거든. 이미 스물을 훌쩍 넘긴 나이였지만 그때껏 스스로를 어엿한 성인이라고 여겨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거야. 그때 내 손으로 지은 ID는 myself였다. 그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던 마음을 떠올리자 좀 먹먹해지네. 초보자, 풋내기라는 의미의 novice, 전주곡이라는 뜻의 prelude 같은 ID의 너희들 역시 나와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소설가 정이현 ㅣ 출처:경향DB

 

삐삐도 휴대폰도 없던 때에 어떻게 그렇게 자주 만나 어울려 다닐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하기도 해. 특별한 약속도 최소한의 구속력도 없이 그때그때마다 우리는 자유롭게 모이곤 했어. 어떤 날은 세 명, 또 어떤 날은 예닐곱이기도 했지. 일찌감치 만나 햄버거를 먹고, 영화를 보고, 한강시민공원에 일없이 가 앉아있기도 하고, 소주도 많이 마셨다. 문득 시계를 보며 “아니 벌써 이렇게 됐어?”라고 깜짝 놀랄 만큼 하루하루는 훅 지나가버리는 것 같았지. 그러나 그 시간들이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면 얘기가 달라졌어. 청춘의 계절은 참 지루하도록 천천히 몸을 바꾼다는 걸 그때 알았어. 친구란, 사소하고 우스꽝스러운 어떤 나날들을 같이 견뎌낸 사이에만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것도.

 

해가 바뀌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공기도 조금씩 변해갔어. 어느덧 돌아보니 우리는 뿔뿔이 흩어지는 중이었어. 누구는 군대에 갔고, 누구는 유학을 갔고, 또 누구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은 채로 가장 멀리 떠났지. 그리고 이제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히 흘렀다고 생각해. 나는, 잘 지내고 있어. 하루에 두 번 어항 속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고, 소설을 쓰고,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커피를 마시지. 술자리를 가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속이 더부룩해져서 규칙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아야겠다는 결심도 한다. 보고 싶은 친구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지내니?

 

누구와는 아직도 간간이 사는 소식을 전하며 살고, 누구와는 연락이 완전히 끊겼고, 또 누구와는 몇해 전쯤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가 다시 멀어졌다. ‘언제 한번 보자’는 말, 지키기가 점점 쉽지 않더라. 섭섭하지는 않아. 그럴 리가 있나. 나 역시 너희들을 언제나 그리워하면서 사는 건 아니니까. 그건 성의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가진 에너지의 여력에 관한 문제일 거야. 너희들의 오늘도 다르지 않겠지. 그 생각을 하면 갑자기 내 나이가 조금 덜 쓸쓸해진다.

 

너희들을 만나기도 전에, 그러니까 아주 어릴 때 처음 들었던 곡이 떠올라.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유심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눈을 감고 노래를 음미하는 아버지를 그땐 이해하지 못했어. 낡은 유행가인 줄로만 알았는데 내게도 그 여운이 별빛처럼 가슴에 스며드는 순간이 오다니! 그래서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는 건가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