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 마지막 편지

[내 인생 마지막 편지](21) 안현미 - 시에게

안현미 | 시인

 

 

 

불을 켠다. 오랫동안 캄캄했던 컴퓨터 모니터, 먼지가 뽀얗게 앉은 스탠드 그리고 생의 마지막으로 불멸의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마음과 더 이상 무언가를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오래된 불안을 향해서도 불을 켠다.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빛이리라. 그런 후에는 다시 최초의 어둠을 향해 가는 건가?

 

스물아홉. 나는 어둠 속에서도 적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는 적외선 잠망경 같은 전쟁 무기를 수입하는 무기 수입 에이전시에 다니며 낮에는 돈 벌고 밤에는 뒤늦게 들어간 대학 마지막 학년 전공 수업을 듣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그해는 분단 55년 만에 첫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졌고 6·15 남북공동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모처럼 남북 간 관계는 역사 이래 유례없이 상생과 통일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내가 다니던 무기 수입 에이전시는 창업 이래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고 나는 졸지에 실직자가 되어 당장 마지막 학기 등록금조차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지 모르는 막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때 즈음이었나?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시인이 될 수 있다면 영혼까지도 팔 수 있다고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고 다녔던 게? 그런데 그 허무맹랑한 걸 생각이랍시고 서슴없이 떠들고 다녔던 스물아홉의 철없는 나의 치기는 왜 그렇게 아름다웠지? 그건 아마도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네가 나를 찾아왔기 때문.

 

시인 안현미 ㅣ 출처:경향DB

 

파블로 네루다 선생 말씀을 좀 빌리자면 ‘그러니까 그 나이였다. 시가 날 찾아왔다/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겨울에서였는지 강에서였는지/언제 어떻게 왔는지’. 마찬가지로 나는 네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태백에서였는지 성바오로 병원 산부인과에서였는지 모른다. 다만 네가 언제 날 찾아왔는지는, 네가 찾아오던 순간 내 영혼이 얼마나 떨렸었는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스물아홉. 세기말을 뒤로하고 새로운 세기가 도래하고 있었고, 새로운 세기는 문화의 세기가 될 거라고 많은 사람들은 전망하고 있었고, 설명하고 싶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데리고 네가 나를 찾아왔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그리고 나는 21세기 시인이 되었다!

낮에는 돈 벌고 밤에는 공부하는 고단한 생활을 견디게 하고 자발적 가난을 각오하면서 영혼을 팔아서라도 되고 싶었던 시인. 오로지 시인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새로운 차원의 시간을 선물로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의 분에 넘치는 사랑이 쏟아졌고, 그 사랑들로 상처받은 자존감을 치유할 수 있었다. 오 놀라운 시!

 

그러나 내 인생 마지막 편지를 쓰는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을 돌이켜 대략 요약해보면 시행착오와 전전긍긍의 연속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먹고사는 방편을 해결하느라 본업인 시 쓰기에는 소홀한 시인이었고, 시 쓰기에 소홀했으므로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불안과 절망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시도 때도 없이 괴롭게 했다. 시만 생각하면서 아침을 맞이하고 시만 생각하다가 하루를 마감하는 삶이 어딘가 있을 거라고 항상 다른 곳만 바라보느라 삶을 혁명에 바친 체 게바라의 삶을 동경했으나 세계의 불행에는 무관심했다. 미안하다.

 

어둠을 본다. 이제 내가 너를 찾아가야 하리. 나는 모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너를 찾을지. 평생 너와 함께 시행착오와 전전긍긍 속에서 함께했으나 나는 모른다. 시가 무엇인지, 생이 무엇인지. 그리고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고도 너를 시라고 쓰고 읽고 믿었듯 나는 생을 살았고 죽음을 흔쾌히 겪으리라. 시여, 감사하다. 내가 시인으로 살고 시인으로 죽을 수 있도록 그때 나를 찾아와주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