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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편지](17) 채정호 - K, 진심으로 보고 싶소

채정호 | 가톨릭대 교수

 

 


K, 당신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은 망치로 머리를 후려치는 것 같았소. 멀쩡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의식을 잃고 깨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더군. 내 넓적다리보다 더 굵은 팔뚝을 가진 사람이, 매일 아침마다 한 시간 반 이상 뛰고, 하얗게 밤을 새워도 끄덕하지 않을 만큼 그 누구보다도 강건했던 체력을 가진 당신이 의식불명이라니. 20분밖에 주지 않던 면회 시간이 너무 야속합디다. 삐삐거리는 기계 소리 가득한 중환자실이 얼마나 춥고, 쓸쓸했소. 차라리 정말 아무 의식이 없었던 것이라면 모르겠소. 하지만 혹시 다 알아들으면서 눈동자도 손가락도 까닥하지 못했던 것이라면, 목메어 울먹이고 머리를 쓰다듬던 당신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못하고 당신의 발을 꼭 잡고 계시던 어머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얼마나 속이 상했겠소. 당신을 눕혀놓고 돌아보니 도처에 당신 모습이 있더구먼. 하긴 그동안 참 많이 함께 다녔었던 것 같아. 수많은 사업장에, 워크숍 장소에, 또 뒷골목의 밥집과 호프집 등을 찾아다니며 우리끼리 밥과 술도 많이 먹었잖소. 덕분에 마음도 많이 나눌 수 있었다우.

 

충청도 어디였던 것 같구려. 꼬불꼬불 시골길을 가면서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서로의 옛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기억나우? 당신이 나를 평생 형으로, 멘토로 섬겨주고 따라주었듯이 나도 진정 당신을 좋아했소. 항상 살 좀 빼라고 타박하기는 했지만 내심 그 듬직한 덩치를 바라보며 아주 든든했다우.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당신만은 나를 믿어줄 것 같았다우. 혹시라도 내가 처자들보다 앞서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남은 식구들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의리로 똘똘 뭉친 당신이라는 생각을 했었다우.

 

채정호 가톨릭대 의대 정신과 교수 ㅣ 출처:경향DB

 

하지만 이제와서 돌아보니 단 한번도 그런 말을 표현하지는 못했소. 늘 밀린 일을 처리하는 것이 무슨 대수라고 제대로 꽉 안아주고 믿는다고, 좋아한다고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 너무 아쉽소. 그저 미안할 뿐이오.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등져버린 당신 상을 치르면서 문상객들 틈에서 당신이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근사했는가를 알 수 있었소. 학교 동창, 재수 때 친구, 옛 직장의 선후배, 지금 회사의 직원들, 일가 친척들이 한목소리로 이야기합디다. 말하는 것과 사는 것이 같았던 당신, 비록 나보다 어리지만 그렇게 살아온 당신을 존경한다우. 다들 너무 짧은 삶이라고 아쉬워하지만 어떻게 보면 충분히 삶에 많은 궤적이 있습디다. 영화와 같았던 연애 이야기, 세일즈맨 시절에 오더를 따기 위해서 그 지역을 잡고 있던 마피아와 형, 동생 하고 밤새 술 마셨다는 무용담. 부도를 막으려고 뛰어다니면서도 세상에 없던 사업을 만들어 낸 수완, 정말 당신 대단했소.

 

사막같이 메마른 줄 알았던 내 가슴 깊은 곳에 이렇게 많은 눈물이 있는 줄 알게 한 당신. 운전 중에도 순간순간 먹먹해지는 가슴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모르겠소. 하지만 하늘같이 믿던 남편을 잃은 아내와 천금같이 귀한 외아들을 먼저 보낸 어머님의 마음을 생각하면 내가 슬픈 것이 감히 비교나 되겠소. 상 치르는 내내 가슴이 찢어지셨겠지만 웃으면서 손님들 불편한 것 없는지를 살피시는 어머님을 보면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품어나가던 당신의 품성이 어디에서 왔는지 목격할 수 있었소. 그런 당신과 짧은 시간이나마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일했다는 것이 너무도 감사하오. 당신은 갔지만 이 일을 통하여서도 많은 것을 가르치고 아낌없이 주는 것 같소. 사실 지금은 이렇게 슬퍼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 우리는 또 우리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오. 당신에 대한 기억도 슬슬 사그라지겠지. 하지만 당신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요. 아니 잊고 싶지 않소. 그냥 또박또박 새겨서 당신이 한 말, 눈빛, 태도, 꿈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소. 비록 당신을 살릴 수 있는 재주는 없지만 당신의 꿈을 내 삶에 실어보겠소. 처음에는 당신이 벌떡 일어나서 정말 잘 잤다고 하면서 특유의 너털웃음을 터뜨려 줄 것이라고 기도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나지 않았소. 하지만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게 되었소. 당신 덕분에 내가 살면서 많은 소중한 것에 쌓여서 살고 있었다는 것, 지금 바로 살아있다는 것, 삶을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것인지를 깨우치게 되었소. 우리도 언젠가는 어쩌면 금방일 수도 꽤 시간이 흐른 다음일 수도 있지만 곧 가게 될 그곳에서 그 호탕한 웃음을 다시 들으며 힘차게 껴안아 볼 것을 기대한다우. 당신을 보내면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지금 당장, 바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오. 혹시 내 말 들을 수도 있소? K, 진심으로 보고싶소. 미안했다우, 사랑한다우, 그리고 정말 고맙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