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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편지](15) 윤영수 - 노력은 해볼게요

소설가 윤영수

 


당신을 누구라 불러야 할지 저는 모릅니다. 당신을 뵌 적도, 목소리조차 들은 적도 없으니까요. 제 뜻과는 관계없이 세상에 저를 던져놓으셨으니 또 어느 순간 당신 뜻대로 제 삶을 거두시겠지요. 부탁드려요. 너무 아프게도, 너무 흉하게도 말아주세요.

 

따져보면 중간부분도 온전한 제 의지는 아니었어요. 처음과 끝에서 당기는 끈이 워낙 거센 데다 당신이 신명나게 던지신 수많은 인간들의 각기 다른 의지와 쨍강쨍강 부딪히느라 끊임없이 피를 흘려야 했거든요. 모든 이의 시선을 피해 쫓기듯 혼자 숨은 공간, 이곳이야말로 안전하겠지 싶어 주위를 둘러보면 저 스스로 저를 가둔 함정이었고, 큰길에서 다른 이와 똑같이 행동했으니 아무 문제없다고 안심하는 순간, 그 사람들 모두 겉으로는 의연하되 속으로는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라는 사실에 진저리를 치기도 했지요.

 

감사의 말씀은 드릴게요. 책이나 텔레비전에 비치는, 단 한순간 천적으로부터 비켜날 수 없는 모든 동식물들의 일생에 비하면 인간으로 살게 해주신 것은 당신의 특별한 배려였어요. 무엇보다 여자로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출산의 고통이 끔찍하긴 했지만 또 다른 생명을 이 땅에 가져오는 도구로 써주신 건 정말 특별한 의미였어요. 그 생명들 역시 제 삶과 다를 것 없이 고단하고 서글퍼 때로 당신을 원망하겠지만요.

 

소설가 윤영수 ㅣ 출처:경향DB

 

염치없지만 한 말씀 올릴게요. 아직 퇴장을 명하지도 않았는데 다음 삶에 대한 부탁말씀 올리는 게 김칫국부터 마시는 노릇이지만요. 이 시대의 과학이 그러더군요. 수십억년 온 세계의 모든 개체가 죽고 태어나기를 거듭해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총 원소 수, 기본적인 분자 수는 일정하다고요. 그 이론이 그야말로 과학적이라면, 제 몸을 이룬 분자도 태곳적부터 있어왔고 앞으로도 어떤 형태로든 영원하겠지요. 먼 옛날 거대동물의 척추 세포가 제 몸의 것일 수도 있겠고, 또 가까이는 한국전쟁 때 길섶에 버려졌던 갓난아이의 몸뚱어리, 그 주검을 양분으로 빨아들인 푸성귀, 그 푸성귀를 씹은 제 어미를 통해 제게 왔을 수도 있겠고요. 희로애락을 느끼는 제 얇은 신경세포도, 이것도 머지않은 미래에 수백 수천의 개체로 흩어지겠죠?

 

물방울이 되고 싶어요. 이승에서 친근했던 수많은 분들, 제 자신보다 더 귀한 그분들께 이 아침 시원하게 목을 축여주는 한 컵의 물, 수려한 경치에 어울리는 멋진 물줄기가 되어 한때나마 위안이 되고 싶어요. 가문 논밭을 적시는 단비가 되면,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되면, 어린아이의 뺨을 물들이는 석양의 새털구름이 되면 또 반갑다 웃어주시겠지요.

 

참, 싫은 사람을 만나면 어찌할까요! 사람을 그토록 괴롭히고도 괴롭혔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강철 심장의 그분들을 만나면 어떻게 피해야 할까요. 그분 역시 물방울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소원이라 저와 함께 내내 움직여야 할 운명이라면, 맙소사, 이러다가 저는 한순간에 집채고 생명이고 모두 앗아가는 광포한 물더미로 변하는 건 아닐까요!

 

당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겠지요.

 

“그러니 죽기 전에 응어리를 풀어. 미운 사람을, 싫은 감정을 좋아하도록 해.”

 

노력은 해볼게요, 아무 원한 없는 편안한 물방울이 될 수 있도록. 글쎄, 노력은 한다니까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하지만 제 속 좁은 건 아시잖아요. 약속은 꼭이 못 드려요. 당신이 참 무심하시다, 멀리도 계시다 원망은 했지만 사실 그 덕에 제 성질껏 실컷 사랑하고 실컷 미워하며 살 수 있었어요. 당신, 정말 감사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