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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편지](27) 김종해 - 동화작가 내 친구여

김종해 | 시인

 

 


Y형, 모처럼 자네에게 편지를 쓰네.

 

동화작가 내 친구, 한번도 지방의 생활권을 떠나본 적 없는, 평생 초등학교 평교사로 지내며 정년퇴임한 동화작가 내 친구를 위해, 젊어서 자주 주고받았던 편지와는 또 다른 마음으로 오늘 실로 오랜만에 이 편지를 쓰네. 만약 내게 죽음이 먼저 이르러 이승을 떠나기 직전에, 하느님이 한 사람과 마지막 한 통화를 허락해 준다면, 친구여, 나는 그대에게 전화하리라. 그간 문학이란 화두를 내세워 55년간 쌓아온 우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넉넉하게 한국의 산수화 같은, 낯익은 모국의 흙과 바위 같은 익숙한 눈빛의 그대에게 나는 묵언(默言)의 작별을 고하리라.

 

정년퇴임 후에도 남해 남지섬에서 혼자 밭을 일구어 해마다 철이 되면 친환경 농법으로 기른 탱자며 유자, 매실을 택배로 보내주는 친구의 맑고 순박한 사랑을 나는 고맙게 받곤 했지.

 

젊어서부터 자네가 쓴 많은 창작동화집을 읽어온 나는 일찍이 자네를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아동문학가로 생각하고 있었다네. 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으로서 반아이들과 꼭 같은 마음으로 지내며, 흐르는 세월 속에서 어른이 될 수 없는 아이들 속의 한 아이로, 정지된 시간 속에 들어앉아 있는 자네를 생각하네. 자네는 천상 아이의 눈높이에서도 아이였을 뿐이네.

 

시인 김종해ㅣ 출처:경향DB

 

자네, 암담한 우리 문학청년 시절이 기억나는가. 우리가 문학수업을 시작했던 것은 1958년. 부산의 각기 다른 야간 고등학교를 어렵게 다녔던 자네와 나. 그리고 교직을 염두에 두고 부산사범학교를 다녔던 오규원(본명·오규옥). 우리 시사(詩史)에 하나의 큰 획을 얹어놓고 먼저 이승을 떠난 오규원 시인을 우리는 잊을 수 없지. 오규원이 처음 서울에 상경했던 그해 겨울. 그래, 그가 ‘현대문학’으로 문단에 갓 등단하던 해였던 것 같아. 그의 상경을 격려하기 위해 우리는 금호동 언덕 판자촌 누옥에서 눈발 날리는 새벽녘까지 막걸리를 통음하며 문학과 현실을 얘기했었지. 막내 김종철 시인도 자리를 같이해서 문청 시절의 어려웠던 부산 생활을 얘기했었어.

 

오규원 시인이 죽고 난 뒤 나는 부산에 갈 때마다 논밭으로 푸르던 그의 첫 부임지 부산 학장초등학교를 떠올렸어. 빈 교실에서 풍금을 치며 노래하던 패기만만한 젊은 교사 오규원을 생각하며 지난 봄에 나는 ‘친구의 풍금’이란 시를 썼어.

 

“오규옥의 첫 부임지는 학장초등학교,/ 시인 지망생인 그는/ 방과후 교실에 혼자 남아/ 풍금을 치고 있었다/ 벼가 파랗게 자라는 낙동강 하구/ 그의 노래는 새보다 가벼웠다/ 벼보다 더 가느다란 몸으로/ 바람 속으로 스몄다/ 오규옥이 두드리는 건반 위에서/ 시인 지망생인 나는/ 들판 위로 날아오르는 새가/ 바람을 밟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내가 보았던 풍경/ 일평생 귓속에서 풍금으로 울렸다.”

 

이 시를 이 자리에서 인용하게 된 까닭은 자네와 나, 오규원 세 사람의 청년시절의 인간 고리, 세상에 도전했던 우리들의 생애가 결코 허무 속에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남기고 싶어서라네. 사랑과 우정 안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애증(愛憎)이 남아 있다면 이제 버리고 잊어버리세. 마음 안에 일평생 들고 있던 짐마저 남해바다 어디쯤 띄워버리세.

 

얼마 전에 자네가 오래 간직했던 청남 오제봉 선생의 귀한 유묵(遺墨) 이백의 시를 보낸 것을 받고 나는 며칠 동안 또 갈등을 겪었다네.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아 간곡한 사양의 말과 함께 반송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보내준 친구의 따뜻한 마음을 허물고 싶지 않아 서랍 속에 넣어두었지. 그 이백의 시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는 참으로 짧은 한 생의 허무를 깨닫고, 그것을 채우고 즐길 줄 아는 여유로운 지혜를 보여주네.

 

자네, 7월 중순쯤 두 번째 심근경색증 수술을 받는다고 했지. 너무 심려하지 말게. 현대의술을 믿어보세. 퇴원하면 산책과 함께 지속적인 운동을 해보게. 이제 원숙한 할아버지 동화작가로서 써야 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지 않은가. 곧 얼굴 한번 보세나. 잘 지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