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 마지막 편지

[내 인생 마지막 편지](28) 서용민 - 밴드 장미여관께

서용민 | 제일기획 CD

 

 


그러니까 아마 짓궂게도 어린이날이 아니었나 싶소. 불타는 금요일의 후유증을 이겨내고 자상한 아빠 코스프레로 지친 몸을 누인 5월의 토요일 밤이었소. 그날은 내가 애정하는 밴드가 경연에 나온다고 해서 신혼 때 장만한 배불뚝이 브라운관 앞에 앉아서 안테나를 이리저리 휘두르며(케이블에 가입하지 않으면 서울에서도 공중파가 잘 안 나옵디다) 프로그램을 기다리고 있었소. 기다리던 밴드들이 지나가고 댁들이 나옵디다. 삼촌들을 설레게 하는 소녀들로 정화된 시신경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비주얼의 당신들 말이오.

 

한마디로 경악했소. 어릴 적 극장에서 보던 리사이틀 앞 공연이 펼쳐지는 듯했소. ‘동남아 순회공연을 막 마치고 돌아온’ 듯한 세탁소 정장에 선홍빛 코르사주라니. 무농약 무관심, 유기농으로 재배한 듯한 수염은 거리에서 숙식을 취하는 이들의 상징 같았다오. 그것도 잠시. 노래가 나오고 딱 두 줄만에 나는 넘어갔소. “야 봉숙아 말라고 집에 드갈라고 꿀발라스 났드나 나도 함 묵어보자.” <봉숙이> 이건 뭐 21세기 고려가요 아니오. “정을 준 오늘 밤 더디 새어라”던 만전춘이 울고 가고 “회회아비 내 손목을 쥐었던” 만두가게가 문 닫게 생겼소.

 

아, 내 소개가 늦었소. 대체로 이 바닥에서는 내가 하는 일을 카피라이터 출신 CD(Creative Director)라고 하오. 이거야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이고, 쉽게 말하면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나오는 광고 만드는 사람이오. 구색 갖춰야 하는 자리에선 ‘사람이 가진 날것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일’을 한다고 너스레를 떠는데 이젠 그 말도 어렵게 됐소. “야 봉숙아 택시는 말라 잡을라고 오빠 술 다 깨면 집에다 태아줄게. 저기서 술만 깨고 가자 딱 30분만 셔따 가자”고 태연하게 읊조리는 댁들 앞에서 나도 그저 “으흐흐 흐흐 흐흐” 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오.

 

제일기획 Creative Directer 서용민 ㅣ 출처:경향DB

내가 단박에, 노래 두 소절에 그대들의 팬이 된 이유를 대충 짐작하겠지요. 트윗에도 한 번 썼었소. ‘가사 잘 쓰는 뮤지션인 줄 알았더니 노래 잘하는 시인’이더라고. “하루 종일 잠자다 그러다 술이 깨면 신기하게 새벽기도는 빠지지 않고 잘도 가네. 복권 일등 주세요. 아주 소설을 써라” <너그러다장가못간다> 끝에 두 문장으로 속이 후련하기까지 했소. 게다가 손상된 두 발을 허공에 흩날리는 섬세한 손 사위며 단 한 개의 동작으로 노래를 마무리하는 클로징 퍼포먼스는 완숙의 경지에 오른 절제미를 보는 듯했소.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나는 외모지상주의가 싫소. 정작 멸종 위기에 빠진 것은 상어인데 외모 때문에 돌고래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지 않소. 언제부터 머리 큰 게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고, 노안이 우스갯거리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나는 그대들의 비주얼이 좋소(오해 없기 바라오. 진심이오). 수려한 외모뿐만 아니라 나이 듦을 대하는 것도 마음에 드오. 내가 나름 꼴불견으로 치는 것이 회식 뒷자리로 간 노래방에서 안되는 몸짓으로 아이돌 노래 따라 하는 각종 ‘장’님들이오. 트로트에 가사 바꿔가며 아부하는, 일보다 세상을 먼저 배워버린 젊은 것들만큼이나 거북하다오. 그래 놓고는 어두운 지하방에서 술 마시며 “몇 살로 보이냐” 묻고 나이보다 10년쯤 어려 보인다는 말을 팁으로 사는 꼬락서니 말이오.

 

나는 한 세대가 자신의 노래를 갖지 못한다면 불행하다고 보오. 비록 골목마다 돌아다니며 <새마을 노래>를 틀어대는 쓰레기 수거차량에 눈뜨고, 소풍가는 길에도 교련복 입고 군가를 불렀지만 우리도 한때 광석이 형이나 현식이 형 같은 가객들이 있었다오. 하지만 벌써 언제 적 일이오. 우리도 신곡으로 레퍼토리를 좀 다양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소? 좀 솔직하게, 때론 좀 과감하게 애들은 모르는 이야기들을 나누는 재미도 있어야 하지 않겠소? “잠만 같이 잔 건지, 잠도 같이 잔 건지. 손만 잡고 잔 건지, 손도 잡고 잔 건지” <부비부비>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기억이 날 듯 말 듯, 웃음이 터질 듯 말 듯한 노래 말이오.

 

확실하게 처음이고 아마도 마지막이 될 팬레터를 지금 쓰고 있소. PC의 다른 창에는 <나 같네> 라이브 영상이 나오고 있소. “술을 먹고 울고 있는 저 남자 나 같네 길을 잃고 헤메이는 저 고양이 나 같네” 작은 마음으로 따라 부르며 연습하고 있소. 지금은 소심하게 읊조리고 있지만 아마도 다음 회식 때는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부를 듯하오. 경로석에 모셔진 듯, 대우받는 듯하지만 어딘지 뒷방으로 내몰린 듯한 7080 무대 말고 애크러배틱처럼 고난도 테크닉이 칼 군무로 시연되는 음악 순위 프로그램에서 그대의 머리털기를 보고 싶소. 쥐에서 돼지까지 한 바퀴 반쯤 돌아야 하는 나이니까 마지막으로 편하게 한마디 하겠소. 그날이 오면…. “연락해라. 형이 술 한잔 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