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 마지막 편지

[내 인생 마지막 편지](30) 구효서 - 와꾸 선생님, 당신을 부릅니다

구효서 | 소설가

 


두려울 뿐입니다. 마지막 순간, 저에게 남은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동안 긴긴 회한의 밤들을 보냈습니다. 제가 알고 지내왔던 많은 이들에게, 사랑은커녕 고통만 안겨준 바보스러운 생을 뉘우치고 또 뉘우쳤습니다. 아침이 되면 그 모든 이들이 또 미치도록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맘껏 한탄하고 맘껏 그리워하던 그 날들마저 사치였다는 걸 알게 됩니다. 나뭇잎이 떨어져 땅에 닿을 만큼의 시간밖에 저에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는 두려움의 명징한 맨얼굴과 맞닥뜨려 꼼짝 못합니다.

 

그것은 더해지지도 빼지지도 않습니다. 밀리지도 당겨지지도 않습니다. 두려움은 그 자체로 요지부동이며 세상에 유일합니다. 저는 죽습니다. 두렵습니다.

 

비명처럼 당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와꾸 선생님! 생각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나오는 당신이 어찌 이 절박한 순간에 떠오르는 걸까요. 저에겐 웃을 힘도 남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와꾸 선생님은 당신의 별명이었습니다. 어떤 선생님의 별명이 ‘밑줄 쫙’이었듯이 당신의 별명은 ‘와꾸 선생님’이었지요. 와꾸가 일본말인지도 모르고 국어 선생님인 당신을 무례하게 그리 부르기 시작해서 그렇게 굳어져 버린 이름이었습니다.

 

소설가 구효서 ㅣ 출처:경향DB

당신은 문장이나 단어에 밑줄보다는 네모를 쳤습니다. 네모를 그리고 그려 나중에는 칠판이 온통 네모투성이였지요. 하나의 네모가 그려질 때마다 고등학생이었던 저희들은 배꼽을 잡고 웃고 웃다가, 나중에는 각자의 책상을 두들기다 못해 교실바닥에 쓰러지기 일쑤였습니다. 당신은 코미디언보다 백배나 저희를 웃기면서 네모를 그렸습니다. 옆 교실에서 우당탕쿵탕 교실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면 누구나 당신의 국어시간임을 짐작했지요.

 

졸업앨범 편집 담당이었던 당신은 저를 불러 사진을 오리게 하고 끝없이 ‘와꾸’를 치게 했습니다. 지금도 92회 졸업앨범에는 당신과 제가 열심히 그린 와꾸들로 가득합니다. 그 뒤로도 당신은 전문적으로 사진을 찍게 되면서 와꾸 치기를 늘렸습니다. 액자 만들기였지요. 장안의 저명한 장서가이기도 했던 당신의 서재가 사진액자, 그림액자, 서예액자들로 그득했습니다. 당신이 주신 함양 동호정 내부 사진과 해인사 선방 창호지문 사진은 제 책장 양 쪽에 금빛 액자로 걸려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제가 문학상을 받을 때마다 친히 식장까지 오셔서 주었던 저에 관한 기사 스크랩 액자와 소월의 ‘진달래꽃’ 초판 표지 액자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최근 동창 친구와 당신의 서재를 방문했을 때 친구에겐 하석(何石)의 휘호를, 저에게는 변종화 화백의 판화작품을 주셨습니다. 모두 당신의 단골인 인사동 표구점에다 당신이 직접 주문해 제작한 액자들이었지요. 당신은 그야말로 와꾸 선생님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을 떠올리는 까닭을 알겠습니다. 인자함과 웃음과 행복했던 추억으로 위로받으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겠습니다. 어느 날 제가 “어째서 그토록 액자에 집중하십니까?”라고 여쭸을 때 당신이 했던 말씀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두렵기 때문이다.”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당신은 대답하셨습니다. “끝을 몰라 알 수 없는 건 막막하고 무섭다. 든든한 액자를 만들고 그 안에 들여놔야만 안심이다”라고 말이지요. 당신은 또 침통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안심은 그러나 환영이다. 평생 삶의 의미와 이유를 찾고 애써 그것들을 액자에 넣어 이름까지 붙이지만, 실은 두려움을 회피하려는 것뿐이다.”

 

저는 두렵습니다. 왜 두려운지를 알겠습니다. 지금껏 높게 쌓아 왔던 환영의 테두리가 곧 무너지고 끝 모를 막막함의 세계로 튕겨져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튕겨져 나갈 것도 없겠군요. 액자가 없어지면, 제가 있던 이 자리가, 그대로 끝 모를 막막함의 중심일 테니까요.

 

와꾸 선생님. 당신을 부릅니다. 제 언어의 마지막이 될 언어로 당신에게 묻습니다. 생이라는 이름의 액자가 사라지고, 제가 끝 모를 막막함의 중심이 되면 두려움이라는 것도 사라지는 게 아닐까요. 아니, 애당초 있지도 않아서 사라질 일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지 않을까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겠습니다. 그 모든 말이 무용한 세상에 저는 어느새 당도해 있는 것 같으니까요. 고맙습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