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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편지](29) 박범신 - 영훈과 다희에게

박범신 | 소설가·상명대 석좌교수

 


이상해. 날이 갈수록 자꾸 너희와 너희의 이십대 한 시절이 생각나. 기울어가던 1970년대, 그 불안하고 쓸쓸하고 어두웠던 나날이 요즘 들어 부쩍 자주 환영처럼 눈앞을 스치는 거야. 내가 ‘수평이동’과 ‘수직이동’이라는 낱말에 처음 머물렀던, ‘풀잎’과 ‘칼날’의 상반된 이미지 사이에서 고통받았던.

 

너희가 지금의 나를 알아볼까. 벌써 34년 전에 너희를 냉혹하게 떠나보낸 나를. 서른두 살의 젊은 작가로부터, 이제 억지를 부려 70대를 바라보는 ‘늙은 청년작가’로 살아가는 나를. 그래. 나는 바로 너희의 이야기를 <죽음보다 깊은 잠>이라는 제목에 실어서 세상 속으로 떠나보낸 작가야. 사람들은 <죽음보다 깊은 잠>을 내가 쓴 최초의 장편소설이라고 말해. 그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너희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아주 기억력 좋은 독자를 간혹 만나기도 해. 맞아. 누가 “작가”라고만 불러주어도 깜짝깜짝 놀라던 애송이작가였을 때, 너희는 내게 최초의 장편거리를 제공해주었고, 출간 후엔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어 절대빈곤에서 나를 구원했을 뿐 아니라, 내게 언필칭 ‘인기작가’라는 이상한 수식어를 달게 해주었어. 그러니 너희가 나를 잊었을지라도 내가 어떻게 너희를 잊겠니.

 

작가 박범신 ㅣ 출처:경향DB

1978년은 영화배우 최은희가 홍콩에서 실종되었고, 재야인사 수백명이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제9대 대통령에 취임하던 해였어. 내가 너희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최은희가 북한으로 넘어가던 그해 겨울부터였지. 나는 얼음같이 차가운 세상의 벽을 절대 성공적으로 통과하지 못할 캐릭터로 오영훈, 너를 만들었고, 비록 쓰러질지언정 그 시대의 많은 이가 그랬듯이 ‘수직이동’의 욕망을 좇아 어둠을 불살라먹으려는 불꽃같은 캐릭터로 정다희, 너를 창조했어. 작가는 독재자이니 너희는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내가 부여한 캐릭터를 당연히 수용했으며, 그러므로 매우 비극적인 인생을 살아야 했어. 실패와 슬픔을 배제한 소설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내게 최초로 각인시켜준 것도 어쩌면 너희였을 거야. 하기야 내가 아니라고 해도, 유신 말기의 엄혹했던 시대, 오로지 재벌을 키워 경제적 번영을 가져와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지상의 가치로 간주되던 그때, 누가 됐든 대체 어떤 성공과 기쁨을 그릴 수 있었겠니.

 

그동안 나는 장편소설만 해도 39편이나 썼으니 너희처럼 실패하는 슬픈 인간군상을 수백명쯤 거쳐왔을 거야. 한동안은 사회적 구조 때문에 실패하는 사람들에 대해 썼고, 또 한동안은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론적 슬픔에게 반역하는 사람들에 대해 썼으며, 마지막 두 편 <비즈니스>와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자본주의 폭력성에 희생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야. 너희도 겪은 그것이 34년 후의 지금까지 이어져 더욱 강고해졌다는 사실에 분노해서 쓴 소설들이야. 너희는 누구보다 잘 알 거야. 예컨대 영훈이 너는 떠돌이악사로서 요정에 출근하는 전자오르간 주자였는데, 어떤 날 요정현관에 걸려 있던 새장 속의 카나리아 한 쌍이 죽어 있는 걸 발견했었지. 밀실정치시대라 요정이 성업 중일 때였어.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느라 모든 사람들이 카나리아에게 밥 주는 걸 잊었기 때문이었어. 다희 네가 어렸을 때 겪은 삽화도 그래. 목사인 네 아버지 교회에서 기르던 다람쥐가 도토리 주는 걸 사람들이 잊었기 때문에 이빨이 솟아나 죽고 말잖아. 너희가 겪은 그런 식의 폭력은 이제 보편화됐으며, 그것에 대한 불감증도 너희 시대의 한계치를 오히려 뛰어넘었다고 생각해. 그때보다 더 끔찍한 폭력과 광기가 세계를 휩쓸고 있다면 믿겠니.

 

난 눈 감는 그 시간까지 소설을 더 쓰고 싶어. 나는 어떤 인터뷰에서 소망이 무엇이냐고 묻길래 겁도 없이 “순직!”이라고 말하기도 했단다. 그러나 요즘 길을 잃은 기분이야. 한동안 소설을 쓰지 못했고 지금도 역시 어둠 속에 있어. 너희를 떠나보낸 뒤에도 소설을 통해 나는 오로지 더 혹독한 실패, 더 깊은 슬픔만 써왔다는 사실이 혐오스럽다고 자각한 이후의 증세야. 나는 대체 그동안 줄기차게 무엇을 기록해온 것일까. 세계가 얼음같이 차다고 해서 소설도 꼭 그래야 하고, 삶이 ‘탄생이전으로부터 부여받은 슬픔’을 벗어날 길 없다고 해서 소설도 슬픔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오늘 우연히 너희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내가 34년 동안 줄기차게 걸어왔다고 여긴 것은 어쩌면 착각일지 모른다는 거야. 나는 겨우 한 걸음 혹은 열 걸음 안에서 맴돌았었는지도 몰라.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쓰면서 작가가 행복해지고 읽으면서 독자도 행복해지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것. 그것은 사랑처럼 완성이 불가능한 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