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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편지](46) 김형경 - 상원사 전나무숲님께

김형경 | 소설가




‘생의 마지막에 쓰는 단 한 장의 편지’라는 주제의 글을 요청받았을 때 저는 즉각 당신이 떠올랐습니다.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면 반드시 그 숲을 디디고 올라, 숲 속으로 스며들어, 가뭇없이 허공으로 흩어지리라 꿈꾸어둔 그 숲이지요. 


 

강원도 평창 월정사 북쪽 오대산 자락에 자리한 상원사의 전경 (출처: 경향DB)



처음에 그 숲은 죽음 충동과 관련 있었습니다. 20대 시절, 생에 대한 지식과 지혜도 없고,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생을 던져 헌신할 대상도 찾지 못했던 그 시기에 저는 아무래도 이 세상에 잘못 온 것 같았습니다. 너무 늦게 태어났거나 좀 빨리 온 게 틀림없다 여겼지요. 다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마음 가득했지만 어디로, 어떤 방법으로 돌아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서둘러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방법들은 아무래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방법들에 내재된 폭력성, 가학성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기에 숲을 만났을 것입니다. 오대산 상원사 도량에 서서 눈 아래 펼쳐진 숲을 내려다보았을 때 그것은 미묘한 농담을 적절하게 섞어 직조한 거대한 양탄자 같아 보였습니다. 그 숲이라면 나를 받아 안아 만리 허공 속으로 가뭇없이 던져 한 점 티끌로 사라지게 할 수 있을 듯했습니다, 몸을 날려 무한해 보이는 숲의 양탄자 위로 뛰어오르지 않은 것은 그래도 제게 현실 감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헛된 환상으로부터 돌아서듯 천천히 몸을 돌려 상원사 법당을 마주보고 섰을 때, 현기증처럼 머리를 치는 더 큰 환상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법당 뒤, 수직에 가깝게 선 뒷산 산비탈에 빼곡이 자리잡은 전나무들이 그것이었습니다. 수직 산비탈에 서 있느라 법당 지붕 쪽으로 수굿하게 몸을 기울인 전나무 숲은 마치 병풍처럼 법당과 도량 전체를 감싼 형국이었습니다. 팔을 벌려 세상을 감싸안는 자세로 너울너울 몸을 흔들며 군무를 추고 있었습니다. 귀 기울이면 숲을 움직이게 하는 천상의 코러스가 나지막이 들릴 듯했습니다. 


숲은 또한 나를 덮어줄 것 같았습니다. 눈 아래 보이는 초록 양탄자 위로 몸을 날리면 숲은 몸을 기울여 내 몸뚱이를 덮어줄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그 순간 나를 안아올려 더 높은 허공으로 던져줄 듯했습니다. 


나뭇가지의 반동에 힘입어 허공으로 튕겨지면 그대로 가뭇없이 사라질 수 있을 듯했습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묘한 충만감과 안정감이 느껴졌습니다. 언젠가 생을 마칠 때는 반드시 이 숲으로 스며들리라 다짐해두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철없던 시절의 몽상입니다. 


아주 나중에야 철없던 시절 제가 본 것이 신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스 고대 도시 델피에 갔을 때, 아폴론 신전을 감싸고 있는 수직 암벽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즉각 상원사 전나무 숲을 연상시켰습니다. 인간의 땅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점, 신전 터를 감싸 안은 듯한 병풍 모양이 닮아 보였습니다. 수직 암벽은 상원사 숲보다 열두 배쯤 넓은 면적으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몸을 돌려가며 암벽을 한 차례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권위에 승복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그것이 신성의 한 측면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는 못했습니다. 그 후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룩소르에 있는 핫셉수트 신전을 마주하고서야 그 점을 인지하였을 것입니다. 나일강을 바라보며 선 핫셉수트 신전 뒤편에는 아폴론 신전 수직 암벽과 흡사한 산이 신전을 감싸안듯 서 있었습니다. 황톳빛 사막 색깔이라는 점만 다를 뿐, 형태나 크기가 틀림없이 비슷했지요. 신전 앞마당에 서서 황톳빛 병풍을 따라 서서히 몸을 돌릴 때, 비로소 머릿속에서 세 가지 이미지가 겹쳐졌습니다. 그것이 신성의 표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뒤따랐습니다. 물론 저의 미욱한 생각일 뿐입니다. 


상원사 전나무 숲님. 생을 마치는 지금, 저는 평소 다짐대로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평생 당신을 생각하며 충만함과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 대해 감사합니다. 제가 상원사 도량에서 몸을 날리면 마지막으로 긴 팔을 뻗어 저를 건져올려, 가뭇없는 허공으로 던져주시기 기대합니다. 제가 안개처럼 작은 입자로 흩어져 허공으로 무사히 스며들 때까지 지켜봐 주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