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칼럼

[디자인 읽기]한글과 점·선·면

1459년 훈민정음언해(왼쪽)와 1926년 칸딘스키 <점선면>.  

 

한글은 ‘한국국어학’이라는 그릇에 담기에 너무 크다. 한글은 한국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말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은 자신들의 전용문자로 한글을 채택했다. 그래서 한글은 한국 사람들만의 유산이기보다는 세계 문명의 자산이어야 한다. 알파벳이 로마 사람들만의 문자가 아니었듯이.

 

한글은 만든 사람과 날짜, 원리가 밝혀진 아주 독특한 문자다. 한글은 세종에 의해 약 600년 전 발명되었지만 전면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수십년 전이다. 1919년 ‘기미독립선언문’을 보면 토씨 빼고 전부 한자다. 1970년대까지 인쇄매체에 주로 한자가 쓰였다. 지금도 주요 학문용어 대부분이 한자어 혹은 영어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한자, 영어 등 모든 소리가 한글로 표기된다. 이제 비로소 한글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디자인에서 한글의 위대함은 형태에 있다. 한글의 자소는 모두 점·선·면(세모, 네모, 동그라미)으로 구성된 단순한 추상요소이다. 추상적 자소들이 조합돼 말소리가 이미지로 표현된다. 추상예술가인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1919~1933)’의 교사였다. 바우하우스는 건축 전공자였던 소설가 이상이 동경했던 독일의 실험적인 건축디자인학교였다. 바우하우스 총서엔 칸딘스키가 쓴 <점·선·면>이란 책이 있다. 그는 점과 선, 도형과 같은 추상요소를 가지고 소리를 담는 기호를 만들었다. 음악의 악보와 음표처럼 미술에도 문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칸딘스키는 점·선·면으로 알파벳과 같은 문자체계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세종은 칸딘스키가 상상도 못한 일을 해냈다. 추상적 요소들을 갖고 가장 뛰어난 소리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칸딘스키가 한글의 존재와 원리를 알았다면 어땠을까? 세종이 점·선·면을 가지고 알파벳보다 뛰어난 문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엄청나게 감격했을 것이다. 그것도 무려 500여년을 앞서.

 

<윤여경 디자인팀 기자>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0280300025&code=990100#csidx1fbc9a6ef885b85aec3a35eb519eb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