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

딸기

‘Enjoyed the strawberries and cake well enough.’ 미국 밴더빌트대학교의 조선인 유학생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한 모임에 나가 ‘딸기와 케이크를 만족할 만큼 즐겼다’. 1890년 3월15일 그가 영어로 써서 남긴 일기 속 한 장면이다. 윤치호는 미국으로 건너가 난생처음 딸기를 만났다. 북미의 넉넉한 가정이 손님에게 딸기에다 케이크며 아이스크림을 곁들여 대접한 덕분에 이후로도 딸기를 즐길 기회는 더 있었다.

 

몇 해 지난 1896년 5월26일 윤치호는 러시아에 있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축하하는 조선 사절단의 일원으로 크렘린을 방문한 것이다. 이날 윤치호는 너무나 힘들었다. <윤치호일기>에 따르면 사절단장 민영환은 변덕이 심했고, 또 다른 수행원 김득련은 술고래(fish)에 지나지 않았다. 대관식 만찬 앞에서도 무엇을 차렸네, 맛이 어떠하네 할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이날 일기에 남은 먹을거리는 딸기뿐이다. 비용을 아끼지 않은 풍성한 만찬(A substantial dinner)의 증거는 딸기로 충분했다.

 

이쯤에서 고개를 갸웃할 독자도 있으리라. 딸기는 예전부터 익히 먹어온 먹을거리 아닌가 하고. 반만 맞는 말씀이다. 최세진이 쓴 어학서 <훈몽자회>에도 ‘딸기’라는 말만큼은 실려 있다. 최세진은 상용한자 가운데 하나로 ‘매()’를 싣고 그 훈을 ‘딸기’로 풀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사람들이 보통 ‘복분자’라고 부른다(俗呼覆盆子).” <훈몽자회>는 식물을 꽃·풀·나무·과실·곡식·나물로 분류했다. ‘매(?)’는 과실에 넣었다. 그러니 여기 실린 딸기는 곧 복분자겠다.

 

19세기 말에 쓰인 조리서 <시의전서(是議全書)>의 ‘복분자화채’ 항목도 살펴볼 만하다. <시의전서>는 복분자에다 “복분자는 멍석딸기”라고 했다. 오늘날의 분류학과는 꽤 어긋나는 이 혼란이 딸기의 역사이다. 기어코 정리하면, 역사적으로 ‘딸기’란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는 빛깔과 형태와 향미를 품은 과채 또는 과일이었다. 이 큰 동아리에 풀에 빨갛게 또는 검붉게 맺히는 헛열매와 나무의 열매가 뒤섞여 있었다. 멍석딸기도 복분자도 일상에서는 뒤섞인 채였다. 풀에서 맺히는 뱀딸기도 딸기, 나무에서 열리는 산딸기도 딸기였다. 그러다 18세기에 남북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현대 딸기의 조상이 딸기의 역사를 바꾸었다. 유럽 사람들에 의해 18세기 유럽에서 한 번, 19세기 이래 미국을 필두로 지구 곳곳에서 또 한 번, 빨갛고 달콤하고 향기로운 헛열매를 먹자고 본격 재배종의 여러해살이풀 딸기가 다시 태어났다.

 

이윽고 1910년대 이후로는 이 딸기가 한반도에도 들어온다. 생과뿐만 아니라 딸기카스텔라, 딸기잼과 함께 퍼졌다. 밀크티와도 곧잘 어울렸다. 1920년대 조선어 언론은 도시 부근에서 재배하기 좋은 과채 가운데 하나로 딸기를 손꼽았다. ‘이 딸기는 옛날 그 딸기가 아닙니다’ 하는 해설과 함께였다. 어휘는 조선어 딸기 및 양딸기, 중국어 또는 한자어 초매(草), 일본어 이치고(イチゴ, )가 뒤엉긴 채였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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