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

대륙과 대륙, 문화와 문화를 가로지른 만두 “붉은 찬합 열고 보니/ 만두가 서리처럼 희구나/ 보드랍고 따뜻한 것이 병든 입에 딱 맞고/ 기분 좋은 매끄러움이 쇠약한 속을 채운다/ 종지에는 초간장/ 소반에는 찧은 계피와 생강이라/ 어느덧 싹 먹어치웠지만/ 친구의 도타운 마음은 참으로 못 잊어(朱합初開見/饅頭白似霜/軟溫宜病口/甛滑補衰腸/甕裏挑梅醬/盤中도桂薑/居然能啖盡/厚意진難忘).” 조선 전기 문인 서거정이 친구가 선물한 만두 한 통에 부친 시가 흐뭇하기만 하다. 이만한 친구를 두었다면 충만한 인생 아닐까. 이즈음에 더욱 그리운 만두는 피에 소를 싸 빚어 익힌 음식이다. 지져도, 쪄도, 삶아도, 튀겨도, 국물에 띄워도 다 좋다. 피와 소는 서로가 서로에게 폭 안긴다. 아니, 피와 소가 따로 놀지 않아야 제대로 된 만두다. 만두는 짭짤하게도, 심심하게.. 더보기
국수를 찾아서 국수의 계절이다. 익숙하고 친근한 이 사물의 조리 원리에는 재미난 구석이 꽤 있다. 국수의 전제는 곡물의 가루 또는 다양한 식물의 전분에 물을 더해 친 반죽이다. 이 반죽에서 길거나 짧게, 넓거나 좁게, 가늘거나 굵게, 각지거나 원만하게, 별별 형상으로 가락을 내면 일단 식료품으로써 국수가 된다. 순 국숫발만을 일컫는 한국어는 ‘사리’이다. 이렇게 낸 식료품을 주재료로 한 음식이 또한 국수이다. 사람들은 차거나 따끈한 국물에 말아, 짭짤한 양념이며 매콤한 양념장을 얹어 국수 한 그릇을 완성한다. 만두는 국수의 하위분류에 들어간다. 만두란 늘이거나 편 반죽이 전제이기 때문이다. 국수의 가락을 내는 방식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반죽을 양손으로 잡아 뽑아 가락을 내는 방식이다. ‘수타면(手打麵.. 더보기
명란과 우크라이나, 그리고 평화 “한국인은 바다를 내륙 깊숙이 끌고 들어와 살아왔다. 오늘도 그렇다.” 인류학자 오창현 교수(국립목포대)의 이 한마디는 장을 보거나 밥상을 차리거나 늘 새삼스럽다. 그렇지, ‘깊숙이’지! 한국인의 바다는 내륙 뱃길이 끊겼다고 끊기지 않는다. 한국인의 바다는 말에 실려, 말도 못 갈 길이라면 사람의 등에 실려 깊은 골로 들어가고, 높은 산에 올랐다. 두메산골에서도 새우젓 두어 달걀찜 찌고, 젓갈 넣어 김치 담갔다. 구실아치한테서도 잊혀진 화전민도 미역국은 끓였다. 누구에게나, 간 질러 맛 들였거나 잘 말려 갈무리한 수산물 한 입씩은 돌아갔다. 온갖 젓갈, 말리거나 염장한 바닷말, 굴비며 간고등어가 있는 밥상, 말린 가자미·장어·대구·가오리·졸복·멸치·오징어 등등에 얽힌, 이루 다 주워섬기기 어려운 그 ‘깊.. 더보기
100년의 기억 “수라상은 아침 10시, 저녁 5시 두 차례만 올리고 2시쯤 돼서 간단한 간식으로 점심을 대신하셨다. (중략) 한여름 무더울 때면 순종은 ‘오늘 간식은 참외와 제어탕(제호탕)을 먹어볼까’ 하는 식으로 주문을 한다.” 조선의 마지막 왕비 윤씨가 순종과 혼인할 적에 함께 궁에 들어와, 일평생 윤씨의 시중을 든 김명길(金命吉, 1894~1984)이 남긴 회고록 (1977)의 한 구절이다. 김명길은 윤씨와 함께 고종과 순종의 시대를 겪었으니 당시 왕실의 일상에 관한 회고가 사뭇 볼만하다. 그때 조선의 임금은 회고록에 나타난 것처럼 점심이 간소한 세 끼를 먹었다. 이 차림의 기본은 장이다. 낙선재 뒤 광 앞으로는 진간장독 쉰 개가 벌여 있었고, 간장과 고추장 관리 담당자가 따로 있었다. 담당자의 별명은 ‘장꼬마마.. 더보기
도미 아차, 이러다 도미 맛도 보기 전에 이 봄이 이울지도 모른다. 계절의 감각이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봄날은 이제 내게 얼굴만 보여주고 손 한 번 쥘 틈 없이 총총 떠나는 계절이 된 듯하다. 이 판에 도미를 바라 입맛을 다시는 형이하학이 방정맞긴 하다만,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는 바닷물고기가 또한 도미이다. 한국인의 입말과 한국어 사전에서 ‘도미’는 도밋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일체를 이르는 말이다. 요컨대 참돔·먹돔(감성돔)·붉돔·황돔·혹돔·줄돔·군평선이 등등이 다. 도미라는 동아리에 들되 일반적으로 도미라고 하면 ‘참돔’을 가리킨다. 도미는 문헌 곳곳에 보인다. 서유구(1764~1845)는 에서 “사계절 늘 있어 어부들이 언제나 잡지만 음력 3월 조기를 잡은 뒤에 더 많이 잡히므로 서울에서 유통되는 시기.. 더보기
딸기 ‘Enjoyed the strawberries and cake well enough.’ 미국 밴더빌트대학교의 조선인 유학생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한 모임에 나가 ‘딸기와 케이크를 만족할 만큼 즐겼다’. 1890년 3월15일 그가 영어로 써서 남긴 일기 속 한 장면이다. 윤치호는 미국으로 건너가 난생처음 딸기를 만났다. 북미의 넉넉한 가정이 손님에게 딸기에다 케이크며 아이스크림을 곁들여 대접한 덕분에 이후로도 딸기를 즐길 기회는 더 있었다. 몇 해 지난 1896년 5월26일 윤치호는 러시아에 있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축하하는 조선 사절단의 일원으로 크렘린을 방문한 것이다. 이날 윤치호는 너무나 힘들었다. 에 따르면 사절단장 민영환은 변덕이 심했고, 또 다른 수행원 김득.. 더보기
봄은 봄나물이다. 설 지났다고 추위가 가실 리 없다. 꽃샘추위가 남아 있음을 모두 잘 안다. 그래도 사뭇 길어진 해 아래 새싹이 언뜻 비치고 나면 삽시간에 봄이 번질 테다. 아직 산나물은 이르다. 새싹은 볕이 곱게 들어와 앉는 들에서부터 움튼다. 쑥은 이때의 전령이다. 쑥은 겨울 막바지에 이미 머리를 살짝 내밀고, 어느새 덜 풀린 땅을 풀빛으로 물들인다. 그 봄기운을 음식으로 옮기는 방법이 문헌 곳곳에 남아 있다. 그 가운데 19세기 말 쓰인 속 ‘애탕’ 항목은 봄노래처럼 경쾌하다. “세말춘초(연말과 새봄 사이)에 움 돋는 쑥을 뜯어다 깨끗이 다듬고 씻어 한 줌만 다진다. 소고기는 한 줌 부피가 되게 다져 쑥 다진 것과 합하여 기름장·양념을 갖춰 넣어 주물러서 밤만큼 환(丸·완자)을 만든다. 계란은 깨어.. 더보기
생활의 한 토막 “승재와 계봉이는 종로 네거리에서 전차를 내려, 바로 빌딩의 식당으로 올라갔다. 계봉이도 시장은 했지만, 배가 고프다 못해 허리가 꼬부라졌다. 모처럼 둘이 마주 앉아서 먹는 저녁이다.” 1930년대 말에 쓰인 채만식(1902~1950)의 소설 속 어느 장면이 각별하지 않겠는가마는 음식이 있는 풍경 또한 못잖다. 식민지 현실이라든지 사실주의 같은 말은 잠시 접어두자. 최인호(1945~2013)에 앞서 성취한 빌딩 배경 연애는 덤이다. 고향을 떠난 젊은 남녀는 서울에서 드디어 서투나마 연인 관계로 접어든다. 함께 나눈 밥상의 추억은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곡절을 압도했다. 둘은 이제 저녁을 먹으며 로맨티시즘을 연마하는 중이다. “둘이 다 같이 군산 있을 적에 계봉이가 승재를 찾아와서 밥을 지어 .. 더보기
짬뽕 한국어 초마면(炒碼麵), 일본어 챤폰(?烹), 중국어 자후이몐(雜?麵). 짬뽕을 동아시아 사람에게 써 보이자면 어떤 한자와 어휘가 좋을까? 한·중·일 세 나라 말과 한문에 능한 공부꾼들이 머리를 맞댔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꽁꽁 묶어라’를 ‘필(必)자 모양으로 결박하라’로 받아썼다는 글방 농담이 새삼스러웠다. 그래서? 중문판 안내문은 알파벳 ‘Jjamppong’으로 미봉하고 말았다. 2020년 9월19일 군산근대역사박물관과 한국화교화인연구회가 주최한 ‘군산화교 학술 웨비나-학교에서 짬뽕까지 군산화교 다시 읽기’의 막후가 이랬다. 짬뽕 한마디가 쉽지 않구나! 절로 탄식이 터졌다. 짬뽕을 둘러싼 말과 말 사이에서 벌어진 머뭇거림과 유보는 정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정당한 유보를 못 견디는 시대를 건.. 더보기
라면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2020년 10월 말 기준, 한국 라면의 수출이 5억달러를 넘어섰다(잠정). 아닌 게 아니라 라면은 이제 한국인의 일상에 완전히 뿌리를 내린 음식이다. 아울러 대문자 ‘케이(K)’를 접두어로 할 만한 사물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은 라면의 의의를 이렇게 쓰고 있다. “(전략) 특유의 맛으로 세계인의 입맛까지 사로잡고 있다는 점에서 감히 라면은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음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단이 각별히 다가오는 소이는 한국 라면사가 두 세대, 곧 60년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1958년 일본 닛신식품의 창립자 안도 모모후쿠(1910~2007)가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치킨라멘(チキンラ-メン)’을 내놓는다. 제품은 1959년 하루 10만개 생산 .. 더보기
육개장 이즈음이면 모락모락 김 피어오르는 국솥부터 머릿속에 삼삼하다. 콩나물국·북엇국·두부찌개·김치찌개·동태찌개·설렁탕 등이 절로 연상되는 순간, 내가 한국인임을 실감한다. 육개장이 빠질까. 거듭 데워도 맛이 덜 빠지는 미덕이 있는 이 음식에 대한 기록은 일찍이 시작됐다. 유득공(1748~1807)의 와 홍석모(1781~1857)의 에 보이는 ‘구장(狗醬)’, 곧 개장국이 육개장의 원형이다. 당시에는 개고기 장국에 파와 후추 또는 초피를 써서 맛을 냈다. 당시에는 찜과 국의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홍석모에 따르면 구장은 시장에서도 많이 팔았다. 서민에게는 개고기가 만만했을 테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에게는 소고기가 더 좋았을 테다. 구장이 엎어지면 소고기 육개장이요, 닭을 쓰면 닭개장이다. 어느 쪽이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