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

라면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2020년 10월 말 기준, 한국 라면의 수출이 5억달러를 넘어섰다(잠정). 아닌 게 아니라 라면은 이제 한국인의 일상에 완전히 뿌리를 내린 음식이다. 아울러 대문자 ‘케이(K)’를 접두어로 할 만한 사물이다.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라면의 의의를 이렇게 쓰고 있다. “(전략) 특유의 맛으로 세계인의 입맛까지 사로잡고 있다는 점에서 감히 라면은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음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단이 각별히 다가오는 소이는 한국 라면사가 두 세대, 곧 60년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1958년 일본 닛신식품의 창립자 안도 모모후쿠(1910~2007)가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치킨라멘(チキンラ-メン)’을 내놓는다. 제품은 1959년 하루 10만개 생산 능력을 갖추고도 주문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가파르게 성장했다. 1960년 묘조식품도 라면 생산을 시작한다. 묘조식품의 설비와 기술진은 1963년 한국의 기업과 손잡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그해 9월 ‘라멘’이 ‘라면’으로 살짝 바뀌어 세상에 나온다. 한국 라면사의 시작이다. 하지만 라면이 처음부터 잘된 것은 아니다. 이 회사의 사사(社史)에 따르면 “(전략) 그동안 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주식 대용으로 먹어 오기는 했지만 어쩌다가 보조식 정도로 먹는 것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는 국민들에게 라면이 주식이 될 수 있는 식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는 것은 하루이틀에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루이틀을 지나자 일이 됐다.

 

1962년 시작된 정부의 혼분식 장려운동은 1964년 이후 한층 치밀해졌다. 이후 식당에선 밥에 보리쌀이나 면류를 25% 이상 섞어 팔아야 했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오전 11시~오후 5시에 쌀밥 판매는 금지였다. 빨리, 싸게 먹는 수요도 폭발한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고도성장기에 공장으로 몰려든 노동자에게, 부모 없이 한 끼 해결하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라면은 요긴했다. 분식집도 늘어갔다. 1968년 시작한 군납은 최소 비용·최고 효율 판촉이었다. 60만 장정이 라면에 노출된 것이다. 대중은 라면에 김치·고춧가루·흰떡을 더해 라면을 한국화했다.

 

시작은 ‘치킨라멘’이었지만, 라면산업은 대중의 기호에 맞춰 갈수록 소고기·고춧가루·파·마늘로 풍미를 강화했다. 기어코 라면 국물에 밥을 말고, 김치를 반찬 삼아 ‘라면국밥’을 구성하는 풍경은 인류학적 장관이다. 라면은 꾸준히 칼국수·곰탕·짬뽕·부대찌개의 풍미를 모방했다. 구수함·얼큰함·칼칼함·시원함이란 라면에 관철된 한식 관능이다. 또는 떡볶이에서 온 라볶이의 상상력이란 지구적 유행이 된 ‘볶음면’의 바탕 아닌가. 라면 한 그릇에 실로 한국 현대사가 담겼다. 저 5억달러 너머에 한국인의 일상과 행동과 태도와 심성이 자리한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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