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딸바보와 그 딸의 ‘금기’

옛이야기 가운데서 아버지가 등장하는 건 무척 드물다. 이솝 우화, 안데르센 동화, 샤를 페로의 동화들을 뒤져본다고 한들 아버지는 새 아내 그러니까 계모를 집 안에 들이는 계기로 활용되거나 혹은 부재중일 때가 대부분이다. 옛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계모든 친모든 엄마이지 아버지는 아닌 셈이다. 프로이트도 이를 간파해서 엄마와의 애착 관계에서 비롯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다룰 때도 아버지는 매개이지 애정의 대상이거나 최종 지점은 아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옛이야기 중에 아버지가 전면에 등장하는 게 있다. 바로 얼마 전 실사 영화로 변신한 <미녀와 야수>이다.

 

영화 <미녀와 야수>(2017)의 주인공 벨과 아버지.

 

<미녀와 야수>는 아버지와 딸이 등장하는 매우 희유한 동화이다. 아버지가 재혼을 하지 않았고 게다가 딸과 아버지 사이가 유독 좋다. 브루노 베텔하임이라는 아동심리학자는 이를 주목했다. 베텔하임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바탕으로 아버지와의 애착 관계가 지나친 여아의 성장드라마로 <미녀와 야수>를 읽어 냈다. 즉, 아버지와의 불필요한 애착을 끊어 내지 않는 이상 그 어떤 남자도 왕자가 될 수 없다. 남자는 털이 북슬북슬하고, 난폭하고 야만적인 야수에 불과하다. 야수가 교만해서 저주가 걸린 게 아니라 모든 소녀에게 남자는 우선 야수에 불과하다. 벨이 야수를 사랑할 때, 야수가 왕자로 되돌아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 여자가 마음을 바꿔 사랑할 때, 남자는 야수가 아닌 왕자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유독 아버지와 딸이 등장하는 옛이야기에선 아버지가 종종 딸의 앞길을 가로막곤 한다. 우리 옛이야기인 <심청전>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심청의 아버지 심봉사는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에 무턱대고, 아무 대책 없이 공양미 삼백석을 약속한다. 그 때문에 심청은 몸을 팔아 인당수에 빠지고 만다. 말이 효녀이지 아버지 때문에 결국 인신매매에 희생된 딸이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심장도, 눈도 바칠 수 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어째 심봉사는 자기 눈을 위해 자식을 희생한다.

 

농담처럼 과장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한국의 근대 문학을 살펴보다 보면 이렇듯 자식을 키워 송아지 팔 듯 노름빚 대신 혹은 미두로 인한 손해 대신으로 넘기는 경우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 보면 명님이라는 한 소녀가 등장한다. 가난한 부모는 명님이가 얼른 자라 이차성징을 겪고 여자다운 태를 갖기만 기다린다. 소위 명님이가 키워준 값을 해야 그나마 먹고살 돈이 생기기 때문이다. 명님이도 그런 스스로의 운명을 그저 팔자려니 여긴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초봉이의 형편도 다르지 않다. 초봉의 아버지 정주사는 미두로 손해를 보자, 부잣집 외아들로 소문 난 태수가 호색한인 것도 모르는 척 시집을 보낸다. 딸, 초봉의 앞길은 아버지의 이 실수로 인해 영영 얽히고 만다.

 

영화 <사이코>(1998)의 모텔 주인 노먼 베이츠.

딸에 대한 애착을 가진 아버지를 일컬어 딸바보라고들 한다. 물론 요즘에야 딸을 한밑천 재산으로 보고 키우는 아버지는 거의 없을 터이다. 그래서인지 어쩌면 요즘에는 <탁류>나 <심청전> 같은 이야기보다는 <미녀와 야수>가 훨씬 그럴듯하게 들린다. 딸의 앞길을 막는다는 의미가 딸을 물건 취급한다기보다 너무 사랑하다 보니 망치는 쪽이 더 많아졌다는 의미이다. 사랑이 오히려 장애물이 되는 일은 비단 아버지와 딸 사이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숱한 영화와 이야기 가운데서 어머니와의 애착을 끊지 못해 끝내 세상과 불화한 인물들을 여럿 만난 적 있다. 영화 <사이코>의 주인공 노먼 베이츠가 아마 대표적인 예시일 것이다. 부모와 자식은 어쩌면 애정을 붙이는 것만큼이나 떼는 게 중요한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딸이라고 해도 아버지 대신 감옥에 갇힌다거나 아버지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벨이 아버지 대신 스스로 감옥에 갇히고 죽음을 불사하는 것은 효가 아니라 미성숙한 어린아이의 실수에 가깝다. 그렇게 어리기 때문에 야수를 사랑하면서도 아버지를 구하러 되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동안 사랑하는 야수가 위험에 처하게 한다. 물론 이런 방식의 동화 해석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비판받고 부정되고는 했다. 브루노 베텔하임이 분석한 모든 동화는 이를테면 성적인 성장의 격동을 표현한 메타포가 된다. 프로이트가 성장의 모든 단계를 성적인 것과 연관시켰듯이 말이다. 흥미롭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동화가 성적인 성장을 은유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분명한 건 모든 어른에게는 라이오스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사랑하지만 언젠가는 부정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지난 5년을 뒤덮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탈을 쓰는 건 <사이코>와 같은 공포영화적 상황과 다르지 않다. 아버지를 따르는 것보다는 부정할 때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 사랑과 애착을 구분하는 것, 딸을 둔 모든 바보들이 알아야 할 문제이자 여전히 아버지의 그늘에 머무는 덜 큰 딸도 알아야 할 점이다. 상징적인 아버지들, 과거, 역사, 적폐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치와 사업의 민낯  (0) 2017.04.28
비정한 사회의 선악론 ‘보이 A’  (0) 2017.04.17
자연인 박근혜  (0) 2017.03.17
나 자신을 아는 것  (0) 2017.03.03
일회적 삶과 인간의 의지  (0) 2017.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