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비정한 사회의 선악론 ‘보이 A’

- 4월 14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2015년 6월 일본, 책 한 권이 전 사회에 논란을 불러왔다. <절가(絶歌)>라는 책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1997년 6월 엽기적인 살인 행각으로 체포된 연쇄살인범이었다. 3명의 초등학생에게 치명적 상해를 입히고 심지어 생명을 앗고 신체를 훼손하기도 했던 살인범이 고작 8년간 복역하고 세상과 만났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범죄자가 14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소년이기 때문에 범죄자는 소년 A로 보호되었다. 범죄 행각을 과시할 정도로 도취되었던 소년은 출소 후,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의 추억을 담은 책을 펴냈다. 그게 바로 <절가>이다. 피해자들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시점에, 소년범이라 짧은 형을 살고 나온 범인이 그 상처를 판매했던 셈이다.

 

영화화되기도 했던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고백>은 그런 점에서 미성년 범죄자를 보호하는 일본의 소년법에 대해 전면적으로 질문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질문은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악하게 태어나 도덕으로 교화되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과도 통한다.

 

살인 사건으로 14년간 복역하고 ‘잭’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청년이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지만 감춰졌던 과거가 드러나면서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며 갈등을 겪는 내용의 영화 <보이 A>(왼쪽 사진)와 200만달러가 든 가방을 찾는 살인마와 그를 쫓는 보안관이 등장하는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 장면.

 

영화로도 제작된 이 소설을 보자면 아이들은 대부분 선하게 태어나지만 몇몇은 절대적 악의에 의해 지배되는 듯싶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를 물에 빠뜨리고 죽어가는 과정을 즐겁게 바라보고 웃는, 소설 속 소년처럼 말이다.

 

인천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살해 사건은 여러모로 일본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지나치게 잔혹한 수법도 그렇지만 거의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후의 행태들을 봐도 그렇다. 인터넷으로 엽기나 살인을 검색해봤다거나 신체 일부를 가지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보자면 놀라움을 넘어서 마음 어딘가가 날카롭게 아파진다. 어쩐지 대화를 나눔으로써 공감과 연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엽기적인 범죄는 언제나 있었다. 비단, 지금, 여기에서만 발생하는 사건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소년범이라는 점에서 즉, 미성년 범죄자라는 점에서는 이 엽기적 범죄의 사회적 충격은 만만치 않다. 많은 영화들에서 살인을 다룰 때, 그 목적은 분명하다. 영화에서 만큼은 범죄의 원인이 꽤나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프로파일링이라 불리는 작업도 유사하다. 이러이러한 성장 배경을 가진 사람, 이러이러한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 이러이러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 범죄자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사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즉 범죄의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인과관계의 위안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프로파일링은 인과관계라기보다는 선후관계의 규명에 가깝다. 인과관계라고 여기면 마음이 더 평온해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유사한 성장 환경이나 트라우마를 가졌다고 해서 꼭 범죄자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범죄가 많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단일한 논리로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는 늘 용의자보다 한 발짝 늦게 도착하는 나이든 보안관(토미 리 존스)이 등장한다. 그는 적어도 자신의 아버지가 보안관이던 시절엔, 이해하지 못할 범죄는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쫓는 범죄자들 가령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와 같은 인물은 도무지 왜 살인을 저지르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늙은 보안관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다만 한 발 늦게 현장에 도착하는 것 말고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도 가능하다. 역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보이 A>에는 초등학교 시절 미취학 아동을 살해한 혐의로 복역한 후 훌쩍 성인이 되어 세상과 만난 소년 A가 등장한다. 그런 엽기적인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기엔 소년 A는 너무나 맑고,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다.

무균실에서 갑자기 풀려난 소년처럼 세상에 다치는 그를 보고 있자면 끔찍했던 살인이 어쩌면 아이의 실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핵소 고지>, <사일런스>와 같은 영화에서 순결하고도 진중한 눈빛을 보여주었던 앤드루 가필드는 그 눈빛으로 소년의 순진성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10대를 고스란히 감옥에서 보낸 소년에게 세상은 독하고 위험하다.

 

결국, 다시 질문은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 것인가 악하게 태어난 것인가. 아니 어쩌면 질문이 좀 바뀌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내면 속 깊이 남아 있는 선의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그러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 말이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점점 더 이해불가능해지고 잔혹해지고 있는 듯싶다.

 

인간의 공감 능력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엽기적 사태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까. 아마도 그건 제도와 행정을 통한 합리적 해결에 기댄 마음의 자세여야 할 것이다. 불안이 더 익숙한 세상, 부모의 자리에서 미안한 일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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