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살고, 사랑하고, 사유하고

장거리 출장은 드문 기회이다. 일상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전혀 모르는 낯선 타인들과 섞여 좁은 공간에 열 시간 이상 머무르는 게, 어디 일상적일 수 있을까? 답답함이 숨통을 조여 오기도 하지만 막상 이륙 후엔 오랜만의 혼자라는, 즐거운 고독감이 찾아온다. 특히 의외의 영화들을 ‘다시’ 발견할 때 그렇다. 영화평론가라는 직업상 대개의 기내 영화들은 이미 본 것들인 경우가 많다. 몇 편 보지 않은 작품들이 있는데, 그건 못 본 영화라기보다는 보고 싶지 않아서 미루거나 배제한 작품들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도 오지 않는 긴 비행 중, 기내의 모든 조명까지 꺼진 이후라면, 그렇게 평소라면 보지 않았을 영화들을 건드려 보게 된다. 이번 비행의 수확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줄리에타>였다.

 

지금이야 가장 대중적인 장거리 운송수단이 비행기가 되었지만 사실 그 자리에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기차와 함선이었다. 특히 기차는 많은 문학 작품과 영화 작품들에 등장하곤 하는데, 이는 비단 과거에 해당하는 일만은 아닌 듯싶다. 로맨스 영화의 고전이 된 <비포 선 라이즈>에서의 결정적 장소도 기차 안이고,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도 기차가 없다면 서사의 전개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오리엔탈 특급 살인 사건>이나 <낯선 승객>과 같은 1960년대, 1970년대 고전 스릴러에서도 기차는 매우 중요한 밀폐공간이었다.

 

스페인 출신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2016년에 만든 영화 <줄리에타> 속 한 장면.

그런데, 기차라는 운송수단 혹은 여행수단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책을 읽기 가장 좋은 탈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기차 안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문학이나 영화 혹은 미술 작품 안에서 보고는 한다. 에드워드 호퍼의 ‘293호 열차 C칸’이라는 그림을 보면 한 여성이 고개를 숙인 채 무엇인가를 골똘히 읽고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도 기차 안에서 책을 읽고자 하고, <생활의 발견>의 여주인공도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 그리고, <줄리에타>의 주인공 줄리에타도 그녀의 전공인 고전문학 책을 꺼내서, 막 마에나디즘(maenadism·광란주의)에 관한 부분을 읽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런 줄리에타의 눈길을 뺏는 게 등장한다. 바로 멋진 뿔을 가진 수사슴이 느린 동작으로, 촬영된 이미지처럼, 기차와 나란히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줄리에타는 책에서 눈을 떼 창밖의 사슴을 바라본다. 그렇게 아름답고도 우아한 장면은 일상의 어느 한 순간에 편입되기 어렵다.

 

우리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보는 것들은 뻔한 의미에 정박하는 기계적 순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우리 머릿속에 어떤 자동반응을 일으키지 않을 때, 그때 우리는 삶을 벗어난 자극과 새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일상에서라면 결코 떠오르지 않을 ‘생각’을 건드린다. 그러니까 기차가 ‘생각’을 낳는 것이다.

 

그렇게 낯선 생각에 빠진 줄리에타에게 한 남자가 말을 건다. 누가 봐도 남루하고, 음울해 보이는 남자는 줄리에타에게 다가와 ‘말동무’가 되어 달라고 말한다. 말동무, 그러니까 남자는 책을 읽고, 창밖에 시선을 둘 정도라면 어떤 ‘생각’을 하는 여자라 여기고 말을 건 것이다. 그러나 줄리에타는 그 생각의 무게가 버거워, 대화를 거절하고 자리를 뜬다. 안타깝게도 그는 젊은 여성과의 대화를 끌어낼 만큼 매력적이지도 섹시하지도 않았던 셈이다.

 

그런데, 잠시 후 기차가 정차하고 만다. 뭔가 물컹한 물체가 기차의 바퀴에 감촉된다. 사람들은 창밖을 지나던 수사슴이 혹시나 기차에 치인 것은 아닐지 염려한다. 하지만 줄리에타의 예감은 좀 다르다. 그리고 그 나쁜 예감은 어긋나지 않는다. 줄리에타는 남자가 제안했던 대화를 거절했다는 사실에 큰 죄책감을 느낀다. 문제는 그 죄책감이 살아 있는 그녀의 감각적 고민을 넘어서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영화 <줄리에타>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앨리스 먼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이 살아 있는 자의 미미한 고민은 원작에 더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녀는 생리혈이 혹시나 치마에 묻지 않았을까 걱정하고, 식당 칸에서 만난 남자의 성적 매력이 주는 불안한 긴장감에 더 집중한다. 죄책감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지만 한편 살아 있기에 죄책감보다는 에로스의 당김과 감각적 불편함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영화 <줄리에타>와 소설집 <떠남(런어웨이)>의 단편들은 작고, 미묘한 삶의 부분 부분들, 일상과 비일상의 아주 작은 틈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이런 작은 틈들은 정치나 경제와 같은 큰 문제들이 제법 안정되었을 때, 비로소 그 발견이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주제들이기도 하다.

 

지난 몇 년간을 돌아보자면, 특히 영화계에서는 이런 작고, 소소한 문제를 다루기 어려웠던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기내에서 <줄리에타>를 보며 느꼈던 각성과 감동도 사실 그 희유함과 낯섦에서 기인했다. 그동안 우리는 늘 과감하고 과격한 선과 악의 대결에 더 집중해야 했고 또 그러기를 요구받았던 것이다.

 

세상이 좀 달라졌다. 달라진 세상이란 이렇듯 소소하고 작은 일상에 다시 관심을 갖고, 마치 기차를 탄 여행객처럼 책을 읽고, 영화를 보다가, 마침내 ‘생각’에 빠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그런 세상이 아닐까? 우리가 너무 큰일들에 치이느라 미처 돌보지 못했던 삶의 균열들, 그런 균열들에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시절이 왔으면 좋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