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자연인 박근혜

공교롭게도, 최근 극장에서 ‘사람의 본질’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들었다. 사람의 본질이라, 그 얼마나 무겁고도 귀한 말이던가? 첫 번째는 할리우드 슈퍼 히어로 블록버스터 <로건>이다. 놀라운 능력을 가진 소녀를 쫓던 악당들은 소녀와 로건(휴 잭맨)의 행적을 알기 위해 로건의 동료 칼리반을 괴롭힌다. 칼리반은 타고날 때부터 멜라닌 색소를 갖지 못한, 그래서 태양을 견딜 수 없는 엑스 맨이다. 영화 <로건>은 2029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사실 칼리반은 과거에 울버린 로건을 괴롭히는 적이었다. 칼리반에게 햇빛을 쪼이며 악당들은 제안한다.

 

“사람의 본질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잖아? 그렇지?”라고 말이다. 악당은 칼리반에게 로건에 대한 적의가 남아 있고, 그를 추적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지금은 선의를 가진 척하지만 결국 칼리반의 깊은 내면 속 본성에는 악당의 기질이 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적들은 칼리반의 그 악당 본성을 꺼내기 위해 그를 괴롭힌다.

또 다른 목격은 <사일런스>이다. 17세기 천주교의 불모지 일본에 두 명의 신부가 파견된다. 선교를 위해 먼저 파견되었으나 배교했다는 소문만 남긴 채 사라진 페레이라 신부(리암 니슨)를 찾기 위해서이다. 페레이라 신부는 파견을 자원하는 두 신부에게 신을 소개해 준 은인이기도 하다. 스승이자 동료, 멘토인 페레이라를 구하기 위해 두 사람은 만류와 저지를 넘어 일본으로 향한다.

 

영화 <로건>(왼쪽 사진)과 <사일런스>. 두 영화에는 ‘사람의 본질’이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일본행이 위험한 도박인 이유는 너무도 선명하다. 17세기 일본은 천주교의 무덤이었다. 게다가 일본은 아주 오랫동안 다신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번주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색출해 고문과 참형으로 금지를 알린다. 그런데, 그 고문이나 형벌이라는 게 참으로 끈질기고 집요해서 더욱 끔찍하다. 가령, 작은 구멍이 뚫린 바가지에 100도에 육박하는 온천물을 담아 아주 천천히, 여러 번 맨몸에 뿌린다던가,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구멍에 얼굴만 처박는데 그것도 빨리 죽어서는 안되니 피가 통할 수 있는 작은 상처를 만들어 숨통만 트여 주는 방식이다. 이러한 고문은 형벌이 아니라 처벌의 전시에 가깝다.

 

번주들은 신부들에게 이르길, 네가 배교하면 너를 따르던 수많은 일반 백성들을 살려주겠노라고 거래를 제안한다. 사실 페레이라 신부는 이런 제안을 수긍한 후 이미 일본인 이름을 받아 일본인 아내와 일본인처럼 살아가는 중이다. 그러나 젊은 신부들은 쉽게 제안에 응할 수 없다. 그런데, 그를 설득하던 페레이라가 이런 말을 한다. “산과 강은 움직일 수 있지만 사람의 본질은 움직일 수 없다.” 과연 배교를 설득하던 신부가 내뱉은 사람의 본질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에밀>을 쓴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사람의 본질이 선하고 어질다고 믿었다. 심지어 <에밀>의 첫 구절에 “조물주는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했으나, 인간의 손길이 닿으면서 모든 것은 타락하게 된다”고 쓸 정도였다. 그는 올바른 교육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아름답게 가꿔 나가는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 중 하나는 루소가 ‘자연인’이라고 부른 개념이다. ‘자연인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이다. 루소는 자연 상태를 높이 샀지만 자연인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싶다. 오히려 자연인은 제 멋대로인 이기주의자의 모습에 가까운데,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동료하고만 관계를 맺고 있는 독립적인 실체”를 자연인이라고 지칭한다.

 

최근 청와대에서 삼성동으로 거처를 옮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부르는 호칭 중 하나가 바로 ‘자연인’이다. 나는 처음엔 왜 박근혜를 전 대통령이나 시민으로 부르지 않고 자연인으로 호명할까 의아했다. 하지만 루소의 <에밀> 가운데 하나의 실마리가 있다. 자연인의 반대편에 놓인 말은 사회인이다. 사회인이란 훌륭한 사회제도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최대한 변형시키고, 상대적인 존재가 되어 자아를 사회 속에 융합시킬 수 있는 인간을 뜻한다. 말하자면 자연인은 사회화가 덜 된 그리고 사회제도를 통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아무렇게나 쑥쑥 자란 자연물과 다르지 않다. 제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그런 인간 유형,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동료하고만 관계를 맺는 그런 인간 유형, 그런 유형을 이미 루소가 ‘자연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왜 박근혜가 타인의 고통에도 무감하고, 자신의 잘못에도 무관심한지 ‘자연인’이라는 용어는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는 듯싶다. 애초에 자연인에게는 남이 없다. 사회도 없고 더더군다나 법이나 제도도 없다. 훌륭한 자아는 훌륭한 사회제도 안에서 태어난다. 즉 우리가 힘겹게 동의한 제도 가운데서 본성을 최대한 변형시키고, 상대적인 존재로 거듭나야 훌륭한 자아와 만나고 사회인이 될 수 있다. 오늘도 늘 그렇듯이 머리를 다듬던 미용사가 오전 9시면 삼성동으로 출근한다. 그게 본성이든 습관이든 사람은 그렇게 바뀌기 힘든가 보다. 그러나, 바뀌기 힘들다고 바뀌지 않는다면 그게 우리가 말하는 가치 있는 인간이며 삶일 수 있을까? ‘인간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기보다 정말 바꾸기 힘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