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일회적 삶과 인간의 의지

타인의 말을 외국어처럼 들어라.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타인의 언어를 외국어처럼 듣게 되면 소통의 장애는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말을 다 이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통의 장애와 만난다. 가령,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 “미워”라고 말한다면 바로 화가 나겠지만 만일 외국인이 같은 말을 했다면 혹시나 단어를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닐까 먼저 헤아려 본다는 것이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오히려 소통에 어려움을 가져온다. 만약, 비트겐슈타인이 살아 있었다면 영화 <컨택트>를 보고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까? 타인의 언어를 외계인의 언어처럼 들어라, 라고 말이다.

 

영화 <컨텍트>의 한 장면.

영화 <컨택트>는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Stories of your life)>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간혹 영화가 수입되면서 아쉬운 번역이나 각색이 발생하곤 하는데, 컨택트라는 제목도 그렇다. <컨택트>는 한국에서 개봉하기 위해 만들어 낸 제목이고 사실 원제는 <어라이벌(Arrival)>이다. 아쉬운 이유는 이 ‘어라이벌’이라는 제목이 영화의 의도를 좀 더 풍부하고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원작이긴 하지만 독립된 작품으로서의 차별성 역시도 이 원제, 어라이벌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도착을 의미하는 어라이벌은 영화 속에서 여러 중의적 표현으로 확장된다. 첫 번째 의미는 ‘낯선 존재의 도착’이다. 그동안 낯선 존재, 외계인들은 그저 조우(encounter)하거나 침공(attack)하는 존재로 그려지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도착이다. 도착이란 출발과 쌍을 이루는 개념어이다. 어딘가 목적지를 두고 떠났을 때 마침내 가서 닿는 곳이 바로 도착지이다. 그런 맥락에서, <컨택트> 속 외계인 ‘헵타포드’의 도착은 우연한 불시착이 아니라 의도를 가진 도착으로 보아야 한다.

 

어라이벌의 두 번째 의미는 번역 과정에서 발생한다. 번역에는 도착어라는 개념이 있다. 어떤 언어로 쓰인 작품이 출발어라면 그것이 번역된 언어는 도착어이다. 가령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데버러 스미스의 <The Vegeterian>으로 도착하는 것이다. 주인공 루이스(에이미 아담스)가 언어학자로 설정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듯싶다.

 

마지막 어라이벌, 도착의 의미는 아마 삶의 마지막 종착점일 테다. 우리 삶의 종착점은 무엇인가? 바로 죽음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 종착점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시간을 선적인(linear)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출발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태어나면 죽는다.

우리는 이렇듯 결국 죽음에 도착하는 선적인 세계 안에서 직선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간다. 인류의 언어와 숫자가 선적으로 구성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인류가 현재 쓰고 있는 언어 체계는 어떤 언어를 막론하고 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한 방향에서 시작해 반대 방향으로 이어져 마침표를 향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거꾸로 읽어서는 의미가 형성되지 않는다. 삶이 일방향적이듯 언어가 일방향적이며 이는 곧 우리의 사고체계 자체가 일방향적이며 직선적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과 닮아 있다. 운명이 운명일 수 있는 것은 되돌리거나 번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운명관에 기초한 예술미학이 바로 고전 서사로서의 비극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나 <안티고네> 같은 비극을 움직이는 동력은 바로 정해진 운명의 방향이나 결을 바꿀 수 없다는 확정적 운명론이었다. 돌이킬 수 없다는 시간의 일방향성에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는 무게를 덧보탠 게 바로 비극의 운명론이다.

 

하지만, 만약, 언어가 달라지면 어떨까? 영화 <컨택트> 속 외계인 ‘헵타포드’의 언어는 순환적이고 원형적이며, 시제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의 형상 안에 완성된 의미를 담는 진화된 표의어이다. 루이스는 다른 언어가 다른 사고의 반영임을 알고 있다.

 

지구인이 헵타포드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다. 만약, 우리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운명을 따를 것인가 배반할 것인가? 그리스 비극은 따라야 한다는 엄중함을 위해 예언이라는 방식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그게 남에게 주어진 예언이 아니라 내 안의 직관을 통한 예측이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가 나의 직관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미래 가운데서 고통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과연 미래를 가만히 기다릴 것인가? <컨택트>의 감독 드니 빌뇌브는 그것이 바로 인간의 의지가 가진 기적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듯싶다. 불행을 알면서도 걸어갈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의지의 핵심, 선적 세계에 살아가면서도 그 세계의 규칙을 단숨에 넘어갈 수 있는 초월적 힘이다. 가령, 죽을 줄 알면서도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사람들, 가난하고 아픈 연인의 곁을 결국 지키는 다른 연인, 불치병에 걸린 자식을 결국 포기하지 않는 부모. 그 모두는 그 선택이 사람들이 말하는 보편적 행복,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따른다.

 

키르케고르는 “내 삶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고,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나는 주저 없이 내 삶을 건다”고 말했다. 그런 것이다. 우리는 삶의 고뇌 안에서도 황홀경을 찾고, 그것이 몸의 고통을 가지고 온다고 할지언정 그 가운데서 기쁨을 얻는다. 영화 속 루이스 딸의 이름은 한나(Hannah)이다. 앞으로 읽어도 한나, 뒤로 읽어도 한나. 결국, 의지만이 일회적인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연인 박근혜  (0) 2017.03.17
나 자신을 아는 것  (0) 2017.03.03
유해진과 정우성 사이  (0) 2017.02.06
왕이 없는 세상의 ‘왕’  (0) 2017.01.20
절망한 낙관론자들의 연대  (0) 2017.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