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유해진과 정우성 사이

이럴 줄 몰랐지만, 지금 한국 영화계의 가장 큰 라이벌은 바로 유해진과 정우성이다.

의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좀 미안하지만 유해진과 정우성은 출발부터 다른 배우였다. 유해진이 <블랙잭>에서 시작해 <주유소 습격사건> <공공의 적>의 배달부, 잡범과 같은 단역부터 디디고 일어났다면 정우성은 이러나저러나 <구미호>의 남자 주연으로 영화계에 입성했다. 지금이야 유해진도 주연급 배우라고는 하지만 정우성은 이제야 조연을 해도 괜찮은 배우가 되었으니 출발이 달랐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타고난 외모 탓이 컸을 테다. 악동 뮤지션의 노래 ‘못생긴 척’의 가사처럼, 연극에서 왕자 역할을 하기 위해선 우선 생긴 게 우선이니 말이다.

 

영화 <공조>의 유해진

 

그런데 이런 외양적인 차이 외에도 한국 영화계엔 유해진표 영화와 정우성표 영화가 나뉜다고 할 수 있다. 유해진표 영화는 대개 휴머니즘을 호소한다.

 

반대로 정우성표 영화는 환멸과 풍자와 같은 좀 더 세련된 주제를 미학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다. 2016년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영화 <럭키>와 <아수라>가 예시가 될 법하다. <럭키>가 기억을 잃은 전문킬러의 인간애를 다룬 영화라면 <아수라>는 극단적 시각예술로 무장한 채 현실을 비트는 냉소적 영화였다. 이런 대조는 2017년 명절 성수기에도 고스란히 반복되었다. <공조>와 <더 킹>, 두 영화에서 말이다.


<공조>와 <더 킹>은, 개봉하기 전엔 현빈과 조인성의 대결로 예측되었지만 막상 극장에 걸리고 난 이후엔 유해진표 휴머니즘과 정우성식 리얼리즘의 대조로 귀결되었다. 휴머니즘과 리얼리즘이 대조군이 될 필요는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두 개념이 서로 대조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공조>를 살펴보면 왜 이런 반의어가 성립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조>의 이야기는 북한의 주수입원이라고 할 수 있을 위조지폐 동판에서 시작된다. 위대한 지도자 동지를 위해 개인의 욕망을 억누르고 살아야 하는 북한 체제에서 욕심을 갖는 것은 위반이다. 국가의 것을 ‘자신’이 소유하려는 자, 영화 속 악역 차기성(김주혁)의 악마성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공조>는 이 악마성을 가족과 동료를 서슴지 않고 죽이는 냉혈한의 이미지로 구체화한다. 그는 가족과 동료를 잃은 개인의 적이자 집단의 적이다.

 

이에 반해 북한의 일급 엘리트 군인 림철령(현빈)과 남한의 형사 강진태(유해진)는 정의의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 정의의 핵심이 바로 인간애 즉 휴머니즘이다. 림철령은 북한체제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한다는 점에서 정직한 군인이며, 가족과 동료를 잊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적이다. 강진태의 휴머니즘은 좀 더 소시민적이다. 그는 형사이긴 하지만 칼 맞는 게 세상 그 어떤 일보다 두려워 차라리 감봉과 징계를 선택한다. 조용히, 탈 없이 공무원 생활 마치라는 아내의 엄명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행동강령인 그는 특별히 나쁘고 초라한 인간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이며 평범한 인물에 가깝다.

 

영화 <더 킹>의 정우성

 

반면, <더 킹>에는 정의롭다고 할 만한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겨우 존재한다면, 자신의 삶에 충실한 샐러리맨 검사와 감찰부 여검사 정도일 뿐, 워낙 미미해서 거의 없는 듯이 그려진다. 조연을 무시한다는 게 아니라 영화 속에서 압도적인 것은 바로 악 아니, 악들이다. <공조>가 휴머니즘을 일상의 소소함과 에피소드적 웃음으로 확장한다면, <더 킹>은 악에 육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애쓴다. 확장된 휴머니즘이 나열된다면 육체성을 가진 악은 마침내 나름의 운동성을 갖는다. 그러니까 <공조>의 휴머니즘이 전시장 속에 곱게 전시된 느낌이라면 <더 킹>의 사악함은 꿈틀거리며 움직인다. 곱게 포장될수록 사람은 사라지고 휴머니즘만 박제되는 데 비해 악마성은 드러날수록 살아난다.

 

악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그런데 정의나 휴머니즘과 같은 이념들은 오히려 추상적이고 평범하기 때문에 삶의 진실을 가리기도 한다. 삶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수록 선보다는 악을 그리고 육체적 구체성으로 접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휴머니즘으로 모든 게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하는 유해진이 따뜻하긴 하지만 그 무해한 웃음의 뒤끝은 허탈하다. 인간애, 휴머니즘으로 모든 게 봉합되는 세상이 있기나 할까? 훌륭한 말들은 그 자체로 의미 있지만 때론 공허하기도 하다. 정치인들 사이에서 자유와 민주주의가 허망한 자가당착으로 유용되는 장면을 목격할 때의 당혹스러움도 아마 이와 유사할 것이다. 문제는 휴머니즘이 아니다. 휴머니즘을 가면으로 내세운 상술과 자기기만이 아쉬울 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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