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절망한 낙관론자들의 연대

2015년 ‘멍크 디베이트’의 주제는 인류 공동체의 앞날이었다. 즉, 인류는 더 진보할 것인가 아니면 인류의 미래가 암담할 것이냐를 두고 토론한 것이다. 법인세를 올릴까 내릴까 혹은 연말 정산에 카드 사용분을 넣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와 같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류, 미래와 같은 큰 문제를 토론의 주제로 삼았던 것이다. 이렇듯 크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것을 ‘빅퀘스천’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여기엔 인류의 역사를 발생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를 바탕으로 미래까지 점쳐보려는 큰 그림이 깔려 있다.

 

이렇게 큰 역사, 큰 질문들을 하게 되면 하루하루의 삶과 매일 뉴스에서 다루는 정치 기사들이 매우 하릴없이 작은 것처럼 여겨진다. 사소한 것으로 축소되는 것이다. 진보의 방향성을 주장하는 쪽은 대개 과학자들이다. 그들은 평균수명, 보건, 절대빈곤과 관련된 수치와 통계를 두고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아졌다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 반대 입장이다. 인류의 미래가 그다지 밝지 않다고 말하는 쪽은 수치나 통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의 삶을 근거로 든다. 스위스에 살고 있는 누구,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처럼 말이다. 인류를 커다란 N의 일부로 보느냐 아니면 작은 소문자로 이뤄진 n으로 보느냐에 따라 미래에 대한 판단도 달라지는 셈이다.

 

<사랑하기 때문에>의 한 장면.

 

사실 영화관에 걸리는 영화들도 크게 보면 이 두 가지 차원으로 나뉜다. 인류의 판단과 삶, 현재와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입장과 그렇지 않다고 보는 태도 말이다. 볼테르는 낙관론자(optimist)라는 단어를 ‘세상이 이미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세상’이라는 단어이다. 만일, 이 세상이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사실이라면 세상은 이미 완벽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뭇잎이나 꽃잎의 배열과 대칭만 봐도 그렇다. 음양의 조화라는 말처럼 세상은 이미 완벽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인간을 대입하면 문제는 좀 달라진다. 사람·세상이 이미 완벽하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사람·세상이 사실 흠과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만 한다. 우리가 유머감각이 있고 타인을 잘 용서하는 사람을 낙관적인 사람이라고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머는 자신의 결함에 솔직할 때 가능해지고 용서는 타인의 결함에 관대할 때 비롯된다. 인문학적 낙관론은 나와 타인의 불완전함을 수긍할 때 가능해진다. 여기에 자연과학적 낙관과 인문학적 낙관의 가장 큰 격차가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와 같은 영화들을 보면, 매우 순진한 낙관론에 기대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기 어렵다. 웃음 7, 눈물 3과 같은 서사 배합이 이미 낙관의 구조와 닮아 있다. 유머와 용서, 웃음과 화해는 인간이 인간에게 기대하는 가장 완벽한 낙관적 자세라고 할 수 있다. 흠을 보여 웃기되 함께 웃는 에너지가 되고 울되 나만 우는 비참함이 아니라 함께 우는 공감에 닿는 것, 그것이 바로 이런 소박한 낙관론적 영화가 기대하는 세상의 풍경이다. 김애란의 소설 ‘달려라 아비’의 한 구절처럼, ‘사랑이란 어쩌면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인 그런 세상 말이다.

 

사랑한다면 우스워져도 괜찮다. 그건 행복한 자괴감이고 만족스러운 자기모멸이니 말이다. <사랑하기 때문에>와 같은 영화들을 가족영화라는 장르로 부르는 것에도 인류에 대한 낙관론의 흔적이 있다. 가족이야말로 한쪽이 우스워져도 다른 한쪽이 우월해지거나 우쭐해지는 관계가 아닌, 아니 아니어야만 하는 인류의 최소 위안이다. 딸 앞에서는 바보이기를 자처하는 아버지나 자기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가족을 웃게 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다 착하고 선한 주인공들이 서로의 결함을 껴안고 마침내 화해와 용서를 일궈내는 낙관론이 늘 위안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영화가 제시하는 아름답고 달콤한 낙관론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타인의 결함이 너무 불편하고 나의 흠결은 매우 사소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럴 때는 인류의 아름다운 미래를 인문학이 아니라 단순한 수치와 숫자에서 찾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인류의 평균수명은 점점 더 길어지고, 절대 빈곤은 줄고, 동성애에 대해 좀 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는 건 사실이니 말이다. 그런데, 어쩌나. 수치를 생각해도 암담해질 때가 있다. 바로 이 빅데이터 검색어에 인류 대신 한국을 넣고, 기간을 최근 몇 년으로 제한하면, 수치가 바로 재앙의 징조처럼 전도된다. 자살률, 출산율, 물가상승률, 노동시간 등등 수치로만 보자면 오히려 훨씬 더 비관적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정치가 아닐까? 절망한 낙관론자들의 연대, 그것 말이다. 무릇 가족영화의 핵심은 최소단위의 행복을 향한 인간의 근본적 요구를 확인시키는 것일 테다. 만약, 지금 낙관을 찾는다면 이런 소박한 최소단위의 개체성이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합리적 결심과 평화적 요구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때, 이 정치적 행위가 사필귀정이라는 오래된 도덕과 만날 때, 다시 사라진 낙관이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다수가 정의를 볼 수 있다면, 그래서 그런 정치를 이끌 수 있다면 그래도 여전히 살 만한 것임에 분명하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