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시간과 기억

시간은 흐른다. 지금 흐르고 있는 이 시간도 바로 과거가 되어 버린다.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과거가 다 자랑스러운 것들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어떤 과거는 치욕적이며, 치명적이기도 해서 돌이키고 싶지 않다. 아니, 아예 송두리째 바꾸었으면 한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다. 일방향적으로, 일회적으로 흘러가버리는 시간을 붙잡아 불가능한 시간의 역전이나 반복을 시도한다. 플래시백이나 슬로모션과 같은 것들이 다 시간에 대한 인간의 희망을 반영한 것들일 테다.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영화적 욕망을 잘 드러내는 장르가 바로 시간여행 영화이다. 김윤석, 변요한 주연의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는 그런 점에서, 바꾸고 싶은 과거에 대한 욕망이 시간여행으로 드러난 전형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수현(김윤석)은 캄보디아에서 베푼 선행의 대가로 9번의 시간여행을 허락받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돌아간 시점이다. 그는 어떤 사람을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한다.

 

겉으로 보기엔 그녀를 다시 보고 싶은 것이지만 사실, 이 말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바로잡고 싶다는 의미로 들린다. 돌이킬 수 없는 과오란 무엇일까? 한 순간의 선택, 그 선택이 불러온 결과를 다른 결과로 바꾸고 싶은 것이다.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의 한 장면.

 

대개의 타임슬립 영화들 즉 시간여행 영화들의 금기 중 하나는 과거의 자신과 만나지 않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마주침으로써 시간의 교란이 발생한다는 설정이 따라붙는 것이다. 그런데, 독특하게도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는 오히려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 주요 서사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젊은 나가 30년 후, 나이든 나를 알아 볼 리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의 만남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처럼 보인다. 영화 속 한수현이 실제 폭력적인 아버지로 인해 제대로 된 부자관계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더 의미심장하다.

 

과거 한수현에게는 극복해야 할 아버지만 있었지 충고와 도움이 되는 아버지를 가져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과거 한수현은 부정하고, 외면해야 하는 아버지만을 가진 불행한 오이디푸스였던 셈이다. 현재의 한수현(김윤석)은 과거로 돌아가 젊은 한수현(변요한)의 인생에 조언과 충고를 건넨다. 두 사람은 나-나의 관계라기보다는 멘토-멘티의 관계에 더 가까워 보인다. 심지어 중요한 과거의 열쇠를 푸는 과정에서도 아버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폭력적이며 부끄러운 아버지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그 아버지를 타자에게 인정하는 게, 그게 바로 선택을 바꿀 수 있는 열쇠가 된다.

 

한수현이 그토록 한 여인을 보고 싶어 하면서도 섣불리 과거를 바꾸려 하지 않는 이유도 현재의 자신이 수아라는 딸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 인생보다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더 열심이다.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는 시간여행의 낭만적 즐거움보다는 선택으로 인한 책임을 더 강조하는 작품이다. 여기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곧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이며 이는 곧 책임을 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메멘토>의 한 장면.

 

하지만 말 그대로 시간여행은 영화적 환상에 불과하다. 돌이키고 싶은 과거를 가진 우리들의 형편은 신비의 몰약을 선사받은 한수현보다는 오히려 <메멘토>의 주인공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는 바꾸고 싶은 과거의 선택을 기억으로 교란한다. 즉, 실수투성이의 과거를 지우고 그 위에 기억하고 싶은 기억을 덧씌운 것이다. 마치, 이미 한 편의 영화가 기록된 필름 위에 새로운 영화를 찍어 내듯이 그는 기억을 바꾸고자 한다.

 

심지어 레너드는 기억을 바꾸기 위해 좀 더 정교한 작업을 보탠다. 사진을 찍고, 몸에 문신을 새기고, 기록을 남겨서 가짜 기억을 역사로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주인공 레너드는 5분가량의 사실만 기억하는 단기기억상실증 환자이지만 사실 그는 뛰어난 장기기억보존자이기도 하다. 오히려 단기기억상실증이란 잊고 싶은 기억을 망각하지 못하는 자의 역설적 증상일지도 모르겠다. 단 하나의 기억만 잊으면 좋겠는데, 그 핵심 기억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단기기억상실증이라는 증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레너드는 자신의 역사를 왜곡한다. 왜곡하기 위해 정교한 서사와 증거를 만든다.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정교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이미-거기-있었음’의 사진, 삭제 불가의 문신, 마지막으로 기록의 권위에 기대어 레너드는 자신이 창조한 역사를 진실로 믿고자 한다.

 

어쩐지 이러한 풍경은 청문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핵심 기억은 하나인데 여러 단기 기억의 증상으로 지우고, 그 지운 것을 새로운 기록으로 증명하고자 한다. 기억이 안 난다, 모르겠다와 같은 부정의 언어들은 오히려 ‘너무 잘 기억하고 있다’ ‘잊혀지지 않는다’로 바꿔 들어야 옳다. 아마 가능하기만 하다면,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의 한 부분들을 수정하고 싶을 것이다. 모든 역사적 단기기억상실자들은 어쩌면 잠재적 역사 왜곡자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왜 그토록 역사교과서를 손대고 싶어 했는지 한편 짐작 가는 일이기도 하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