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왕이 없는 세상의 ‘왕’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은 흥미로운 동화이다. 왕이 벌거벗은 채 자신의 왕국 한가운데를 행진한다. 나쁜 사람의 눈에는 옷이 보이지 않고, 착한 사람에게는 보인다지만 옷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왕 자신의 눈에도 옷은 비치지 않는다. 다만 한 아이만이 진실을 이야기할 뿐이다. “임금님은 벌거숭이.” 그제야 진실은 파열음을 내며 세상에 터져 나온다. 왕이 왕일 수 있었던 행진이 무너지고, 그의 백성이 그를 우러르지 않으며, 벌거벗은 남자가 왕일 수 있었던 그 보이지 않는 권위의 커튼이 열어 젖혀진 것이다.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대해 고고학적 논의를 한 적이 있다. 그는 벌거벗음과 가장 멋진 옷 사이에 일종의 관료제가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착한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식의 말을 만들어 낸 재단사는 군주제 안에서 기괴한 논리를 완성할 수 있다. 군주제 왕이 누리는 권위의 핵심은 바로 ‘척’에 있다. 재단사가 잘 알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군주제의 역학이었다. 왕에게는 보이는 ‘척’하는 백성이 필요하고, 이 ‘척’이 제도화될 때쯤 군주제는 클라이맥스를 맞이하며 급격히 쇠퇴했다.

 

영화 <킹메이커>

 

박근혜 정부를 돌이켜보았을 때 가장 많이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이 ‘척’하는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형광등을 백 개 켠 듯 눈부신 척, 도무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이지만 알아듣는 척, 외교 순방의 내용은 없지만 세련된 옷만은 그럴 듯하다는 척. 그런 척들이 모이고 쌓여, 벌거벗은 왕의 행진이 묵인된 것이다. 그러니까 박근혜는 대한제국의 왕으로 군림하고자 했던 것이고 박근혜 정부는 적극적으로 재단사 역할을 자임해왔다. “나쁜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공무원을 구분하던 그 잣대의 문제점은 나쁘다 좋다가 추상적이라는 것에 멈추지 않고 애당초 그 실체가 없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유독 우리 문화에 권력의 정점을 ‘왕’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대학생들이 엠티나 수련회에 가면 의당 하는 놀이인 ‘왕게임’만 해도 그렇다. 누군가 왕이 되면 하고 싶은 대로 권력을 전횡한다. 당하는 사람이 우스꽝스러워질수록 놀이는 탄력을 갖는다. 최근 뉴스에 거의 상투어처럼 등장하는 ‘킹메이커’라는 용어도 그렇다. 대통령이 ‘왕’처럼 군 바람에 발생한 어마어마한 정치공백을 목격하면서도 또 다른 대통령을 ‘왕’이라 연호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이건 그다지 현명한 호명이 아니다.

 

영화 <더 킹>

 

2011년 제작되어 한국에 2012년 개봉한 영화 <킹메이커>만 봐도 그렇다. 영화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과정을 다루고 있다. 대통령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그 대통령 만들기의 음험한 정치적 야망과 협잡, 거래, 전복의 장면들을 담아낸 영화인 셈이다. 그런데 영화의 원제목은 <The Ides of March>이다. 3월15일이라고 해석된다. 정말 재미있는 것은 이 원제의 함의다.

Ides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줄리어스 시저>에 등장하는 어구이다. 고대 로마공화정 말기 예언가가 로마의 절대 권력가인 시저에게 다가와 ‘3월의 가장 높은 날, 3월15일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시저는 이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결국 시저는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였던 브루터스의 칼에 죽는다. 그러니까,


영화 <킹메이커>의 원제 ‘3월15일’은 최고의 권력자가 최측근에 의해 좌절되는 현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자신의 비밀과 비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최측근이야말로 최고 권력가에게는 가장 위험 요소라는 데서 출발한 꽤나 문학적이며 정치적인 제목이었던 셈이다.

 

이 제목이 <킹메이커>로 바뀐 것은 그런데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워낙 직관적으로 이해되기 쉬운 제목으로 바뀌는 게 관례라고는 하지만 <킹메이커>라는 각색은 우리 문화권 내에서 최고 권력자가 왕처럼 군림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설을 앞두고 개봉한 영화의 제목도 <더 킹>이다. 영화 <더 킹>의 주인공들은 우리 시대의 최고 권력자를 가리킬 것이 분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 속 최고 권력자들은 바로 검사들이다. 아니 대개의 평범하고 선량한 검사님들 말고 1%의 권력 지향적 검사들이 주인공이다. 그 1%의 검사들은 애당초 권력을 잡기 위해, 공무원이 아니라 ‘왕’이 되기 위해 검사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최고 권력을 맘대로 휘두르고, 그 맨 꼭대기 위에서 군림하기 위해 검사가 된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자신을 가리켜 ‘왕’이라고 지칭한다.

 

통치하지 않고 군림하는 왕이야말로 이미 군주제와 함께 역사가 쓸어버렸던 악재이자 잔재가 아니던가? 아직도 우리의 눈에 임금이 보인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임금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임금이라는 호명을 통한 개입을 용인하고 있는 것일 테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왕의 옷을 찬양하는 척에서 벗어나 벌거벗음을 고발하는 순수하면서도 용기 있는 소년이기를 자처하고 있다. 촛불은 곧 그 소년들의 행진이다. 이제, 왕은 안된다. 이제 문제는 벌거벗은 왕이 아니라 그 어떤 왕이라도 돌아와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왕은 불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현재 정치의 악이다. 그러니 이제 호명의 각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언어는 문화이자 반영이다. 킹메이커도, 킹도 없는 게 마땅한 세상이 와야 할 것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