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포기할 수 있는 것과 포기할 수 없는 것

아주 오랜만에 영화를 보고 울었다. 2016년 12월 둘째 주에 개봉하는 두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라라랜드>를 보고 말이다. 두 영화가 비슷할까? 아니, 사실 두 영화는 전혀 다르다. 국적이나 배우, 장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포기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려지는 것에 대한 영화다.

 

반면 <라라랜드>는 포기해도 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전자를 두고 우리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두고 낭만 혹은 꿈이라 칭한다. 말하자면, 두 작품은 인간이 지닌 존엄의 스펙트럼 그 끝과 끝에 대한 이야기다.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는 매우 평범한 59세 남자 다니엘 블레이크가 등장한다. 그는 지금 질병수당을 신청 중이다. 얼마 전 일을 하다 심장 문제로 쓰러진 적이 있기 때문이다. 주치의는 재발을 우려해 당분간 일을 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부는 멀쩡한 팔과 다리로 지금이라도 당장 구직활동을 하라며 질병수당 지급을 거절한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다음이 더 가관이다. 결과에 항고하기 위해선 일단 실업수당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구직활동의 증거를 가져와야만 한다. 전문의가 휴식을 권하지만 일을 구해야만 질병수당 자격 재심을 신청할 수 있다. 정말이지 뭣 같은 이 상황은 보건복지부 담당 콜센터만큼이나 답답하다. 무려 1시간40분 동안 지겨운 클래식 통화 연결음을 들려주며, “통화량이 많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를 반복하는 그 기계음처럼 말이다.

 

그렇다. 다니엘 블레이크가 처한 상황은 비행기를 타고 11시간이나 가야만 하는 영국에 가야만 느낄 수 있는, 유럽의 특수한 처지가 아니다. 나에게 부여된 권리를 되찾기 위해 벌칙을 받듯 관공서를 헤매야 하는 다니엘의 상황은 지금, 여기,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런 다니엘이 자신보다 더 불편하고, 당혹스러운 이웃에게 주저 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국가가 제재하고 제도가 거절하는 싱글맘 케이티를 다니엘이 돕는다. 낯선 곳에 이사와 전기료도 못 내고 촛불로 견디는 그녀, 딸린 두 아이에게 음식을 양보하고는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허겁지겁 지원용 통조림을 따 먹던 그녀, 신발 밑창이 떨어져서 친구들에게 놀림받는 딸아이에게 걱정말라고 말해주지만 정작 아무런 해결책이 없는 그녀, 그녀에게 다니엘이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이다.

 

<라라랜드>의 한 장면.

 

다니엘은 넉넉지 않은 자신의 생활비를 조금 덜어 그녀에게 보태주고, 구직활동을 하는 엄마가 없는 동안 아이들을 돌봐준다. 대가를 바라거나, 젊은 여자에게 음심을 품어서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 그 사소함으로 그렇게 다니엘은 타인에게 힘이 되어준다.

 

실의에 빠진 세바스찬과 엠마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도 바로 사람이다. 영화 <라라랜드>는 꿈을 이루기 위해 할리우드에 온 두 지망생에 대한 이야기다. 세바스찬은 유통기한이 지난 음악으로 취급받는 정통 재즈 전용 바를 꿈꾸는 젊은 재즈 피아니스트다. 엠마는 수없이 오디션에 참가하는 배우 지망생이다. 두 사람 모두, 할리우드에 가면 하루에 100명은 족히 볼 법한 그래서 그 꿈이나 좌절조차 너무 상투적으로 보이는 평범한 지망생들이다. 지망생들의 낙담엔 위로도 없다. 만성적으로 그 좌절에 익숙해지거나 아니면 아예 라라랜드(LaLa land·할리우드)를 떠나는 수밖에.

 

영국의 다니엘은 처지가 비슷한 케이티를 이해하고 공감하기에 그녀에게 도움을 준다. 가난한 케이티도 다니엘의 심정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좌절할 때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할리우드의 세바스찬과 엠마는 위로를 건네다 결국 연인이 된다. 사랑만큼 더 깊은 공감의 방식도 없을 테니. 그런데 적어도 지망생 엠마는 케이티처럼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 가방 속에 몰래 훔쳐 나오거나 딸아이 운동화를 사주기 위해 몸을 팔지는 않는다. 세바스찬과 엠마는 오디션에 떨어지고, 유치한 곡을 연주하며 자괴감을 느끼지만 그건 뉴캐슬의 케이티가 느끼는 모멸감과는 다르다. 케이티가 필수품이 결핍된 인물이라면 엠마는 욕망으로 결여를 느끼는 인물이다. 그건 요구와 욕구의 관계만큼이나 다르다.

 

케이티나 다니엘이 견뎌야 하는 수치심은 인간이라면 다른 인간으로부터 받아서는 안 되는 감정적 체벌이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을 위해 마련된 복지 제도가 가난한 사람에게 모멸과 수치를 먼저 가르치려 한다. 마치 그 수치의 대가로 수당이 지급되듯이 말이다.

 

결국, 세바스찬과 엠마는 두 사람의 사랑을 기회비용으로 지출하고 꿈을 이룬다. 사랑과 꿈 모두 이룰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실현된 꿈은 단수일 수밖에 없다. 하나를 얻기 위해선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대개 세상이 그렇다. 영화 <라라랜드>에서 그렇게 가지 않은 길 혹은 버려야 했던 것은 낭만과 향수로 그려진다.

 

그러나 다니엘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도록 요구받았기에 결국엔 너무 큰 대가를 치르고 만다. 포기할 수 없는 것, 말하자면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존엄성을 외면받을 때, 그것은 낭만이 아니라 참극이 된다. 포기할 수 없는 것은 포기하지 않도록 존중되는 삶, 그게 바로 포기가 낭만이 될 수 있는 조건이다. 복지란 그 최소가치의 울타리가 아닐까? 적어도, 꿈은 존엄한 인간에게 허용된 가치이니 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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