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두 번째 삶, 선택

살면서 한 번도 실패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는 없다. 작든, 크든 인생은 이런저런 실패들 위에 서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떤 실패는 삶의 방향 자체를 바꿔 놓는 경우가 있다. 지리멸렬했지만 평범했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화려했던 삶에서 환호가 사라지기도 한다. 여기 몇몇의 인물들이 지금 인생의 전환점을 노리고 있다. 실패 위에서 또 다른 삶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위 사진)의 원제는 <헬 오어 하이 워터(Hell or High Water)>이다.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아도’ 정도가 될 법한데, 영화에 등장하는 두 인물이 바로 딱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는 것 같은 절망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영화는 두 형제가 벌이는 은행 강도를 소재로 삼고 있다. 그런데, 그 은행 강도짓이라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좀 다르다. <보니 앤 클라이드>에서 보았던 퇴폐적 낭만성이나, <내일을 향해 쏴라>와 같은 장쾌한 판타지가 없는 것이다.

 

우선 범행 대상이 되는 은행이 그렇다. 시골 한 귀퉁이의 은행들은 꼴을 갖추고 있기는 하나 큰 규모의 현금지급기와 별반 차이가 없다. 심지어, 폐쇄회로(CC)TV조차 무늬만 카메라일 뿐 녹화가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미 은행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강도들은 그 무늬만 은행인 곳에서 10달러, 20달러짜리 푼돈을 훔친다. 강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면, 이런 은행의 풍경이 영화적 미장센이 아니라 사실주의적 재현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서부, 예외 없이 모기지론, 담보대출이 휩쓸고 간 그곳엔 ‘금융’이나 ‘신용’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다. 즉 현대의 금융개념으로 보자면 훑어 먹을 만큼 다 훑어 먹어서 별 재미가 없는 공간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저당 잡히고 담보 잡혔던 부동산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예상하다시피, 모두 은행이 합법적으로 강탈해갔다. 석유가 매장된 어마어마한 크기의 땅들, 수백마리 소가 있는 농장들이 고작, 갚지 못한 몇 백, 몇 천의 빚 대신에 넘어간다. 평생 가난하게 살아온 카우보이들은 이제 힘겹게라도 지켜왔던 땅까지 다 뺏기고 만다. 그러니, 이제 그들이 은행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헛간의 먼지를 뒤져 찾아낸 동전들을 바꾸는 것 정도이다. 담보가 없는 시민에게 은행은 고작 환전소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두 형제는 은행이 갚으라고 윽박지르는 돈을 은행에서 훔쳐 되갚을 계획을 세운다. 사실, 이자까지 따지자면 은행이 빌려준 돈은 이미 다 갚았다. 그들은 그렇게 두 번째 인생을 계획한다. 형제 중 동생 토비는 적어도 내 자식에게만큼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 사실 그가 선택한 두 번째 인생은 자신의 여생이 아니라 자식을 통한 두 번째 삶이다.

 

영화 <스플릿>(아래)에도 인생의 전환점을 찾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1990년대 볼링 스타였던 윤철종(유지태)은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후 낙오자처럼 살아가고 있다. 가짜 휘발유를 팔고, 거의 알코올중독자처럼 내내 술을 마시며, 국가대표 출신의 솜씨로 사기 볼링이나 치면서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가 나락에 빠진 것은 사고라는 우연이라기보다는 내기라는 선택에 의한 것이라 보는 게 옳다. 영화는 그가 다리를 다친 이유를 끝까지 숨기는데, 알고 보면 그 이유라는 게 잘못된 선택이었음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선악이 분명한 대중영화의 문법상, 철종의 선택보다는 철종의 반대편에 놓인 악인(정성화)의 악의가 더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프로선수가 유혹에 흔들리는 것보다 나쁜 사람이 그를 유혹에 빠뜨린 게 더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모든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말하자면 철종은 악인 두꺼비 때문에 인생의 추락을 경험한 게 아니라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추락한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에 대해 지나치게 운명적으로 판단하고자 한다. 18대 대통령 박근혜가 당선될 수 있었던 저력 중 하나도 바로 불행한 운명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었다. 불쌍한 대통령, 불행한 여성이라는 꼬리표가 박근혜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만약, 그녀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5년만 통치를 하고, 정권을 합법적으로 이양했다면 어땠을까? 과연 그랬어도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총탄에 목숨을 잃고, 소녀 박근혜가 고아가 되었을까? 더 나쁜 사람 때문에 선량한 사람이 실수하는 게 아니라 행동은 이미 선택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정말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선택이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는 것, 즉 책임을 지기 위해서 우선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