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그러므로, 눈을 더 부릅떠야 한다

오늘은 문학 이야기를 해보자. 보르헤스의 소설집 <알렙>에는 미로로 내기를 하는 두 왕이 나온다. 하나는 바빌로니아의 왕이고 다른 한 명은 아랍의 왕이다.

 

바빌로니아의 왕은 미로를 만들어 놓고 아랍의 왕을 가둔다. 아랍의 왕은 늦도록 모멸감 속에서 미로를 헤매다 겨우 나온다. 출구를 찾은 아랍의 왕은 이번엔 자신이 미로를 만들어 바빌로니아 왕을 가둔다.

 

그런데, 그가 만든 미로는 다름 아닌 아무 길도, 벽도, 지도도 없는, 모래뿐인 사막이었다. 사막 한가운데, 바빌로니아 왕은 그 미로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리다 죽는다.

 

영화 <내부자들>(위)과 <아수라>의 한 장면.

 

정말 두려운 미로는 아무 장벽이 없는 미로이다. 아랍의 왕은 “밀칠 문들도, 내달아야 할 하염없는 복도들도, 당신의 앞길을 막을 벽들도 없는 나의 미로”를 보여 준다. 반면 바빌로니아의 왕은 건축과 설계의 귀재였다. 말하자면 바빌로니아의 왕은 인간의 지혜가 만들어 내는 많은 인공물들을 의미한다. 법, 질서, 영화, 미술, 음악, 문학 그 모든 것이 그러니까 인간이 만들어 낸 그 모든 것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반면, 벽이 없는 미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자체이다. 법에는 논리 혹은 모순이 있고, 영화나 음악, 미술에는 처음 혹은 시작이 있다면 마지막과 끝이 있다. 인간이 만든 것은 그러니까 인생보다 쉽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사는 것보다는 음악이나 미술을 즐기고 영화나 소설 보기를 즐기고 또 거기서 인생을 조금씩 학습한다. 아무리 예술이 독해지고, 부조리해진다고 해도 세상보다 독하고 부조리할 리는 없다. 세상은 언제나 더 앞서간다.

 

좋은 예술가들은 마치 예언가처럼 세상의 앞날을 내다보고는 한다. 삶의 이치를 꼼꼼히 읽어내다 보면, 일종의 직관이라 부르는 지혜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오늘, 다시, 박민규가 썼던 <눈먼 자들의 국가>를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바로 이것이다. 좋은 예술가들은 잘못의 핵심을 짚는구나, 박민규가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썼던 내용은 이미 일어났던 일의 해석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의 예언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가령, 그는 “청와대는 TV 뉴스를 보고 사고 소식을 처음 접했다고 했다. 안전행정부 상황실도 국정원도 YTN 뉴스를 보고 사고를 알았다고 했다. 같은 시각 나는 세탁소에 맡긴 옷을 찾으려 갔다가 뉴스를 보았는데, 말인즉슨 나와 세탁소 김씨와 김씨의 부인인 안씨와 정부가 동급이란 얘기였다.” 맞다. 박민규는 냉소적 반어로 말했지만 이 문장이 반어가 아니라 직설법으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 최근 며칠 사이에 밝혀졌다. 정부는 나와 세탁소 김씨와 김씨의 부인인 안씨와 동급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못했다. 누군가의 지시와 검열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

 

이런 말도 있다. “유병언의 시신에 관해서는…, 성인의 입장에서 달리 할 말이 없다. (중략) 제사상에 오른 돼지머리를 보는 듯도 했고, 굿판이란 게 이런 건가 생각도 들었다.” 놀랍다. 이 글은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2014년 봄에 발표되었고 그해 가을 책으로 묶였다. 그러니까, 적어도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굿’이나 ‘제사상’이라는 말이 대한민국 시사용어의 일부를 차지하리라고는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장면은 굿판과 너무도 닮아 있다. 박민규가 말한 비유적 의미에서의 제물과 제사상, 굿은 돌이켜 보니 비유가 아니라 분석이자 통찰이었다.

 

주목할 점은, 그럴듯한 예술가들의 통찰은 소위 우주적 차원의 예언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기꾼은 우주의 힘을 빌릴지 몰라도 예술가들은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말의 뒤태를 보고, 괄호 속에 감춰진 것에서 진짜를 본다. 그런 것을 연습하고, 학습하는 게 인문학이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작가이며 예술가들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우리가 비현실이기에 더 흥미롭게 보아왔던 인공물들을 다시 한번 봐야 할 것이다.

 

영화 <내부자들>의 상상력 일부가 난폭하고 저열했다고 여겼지만 현실은 더 저열하고 난폭하다는 게 드러났다. <아수라>의 과장법이 심하다고 했지만 지금 세상보다는 단정하다. 적어도 거기엔 시장, 검찰, 경찰이라는 공인들이 생각도 하고, 행동도 하니까. 적어도 <아수라>의 수뇌부를 장악한 어떤 민간인 한 분이 계신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말이 안된다고 여겼던 일들이 이제야 선명하게 이해가 된다. 이런 상황이라면 지금껏 말이 안되었던 일들은 너무 당연한 일들이었다. 수많은 사고들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눈을 떠야 한다. 지금 이곳의 선장은 이름만 선장이지 제대로 된 역할과 권한을 갖지 못한 선장이다. 그때처럼 국가는 국민을 구조할 생각이 없다. 아니 능력이 없다는 게 더 옳다. 누군가는 지금도 선내 방송으로 “가만히 있으라”를 외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 개연성도 핍진성도 소용없는 일이 바로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소설창작시간이라면 단번에 낙제를 받을 어불성설의 일들이 ‘현실’로 드러나는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 다시 한번 박민규의 말을 인용하자면, “공공의 적이 공공일 때 그 공공을 심판할 수 있는 건 누구냐고 묻고 싶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