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상처의 공동체, 재난의 커뮤니티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이하 설리)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이 예사롭지 않다. 마음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영화가 대단한 흥행을 기록하거나 화제를 몰고 올 리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영화는 애당초 그런 화제나 흥행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 듯 자못 의연하게 군다. 비록 영화의 소재가 2009년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비행기 추락 사고였음에도 말이다.

 

<설리>는 대개의 상업영화들이 재난을 대하는 관습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사고가 나는 장면을 줌업하거나 반복하는 식의 영화적 기법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최대한 담백하게 전달하고자 한다. 사고를 거의 고스란히 재연하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는 다른 말로, <설리>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재난의 스펙터클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의 관객들의 마음은 그래서, 더 움직였다. 비행기가 강에 추락했다. 눈 깜박할 사이에 비행기 내부로 물이 차오른다. 때는 1월, 수온은 영하 20도 이하였다. 기장이 탈출하라고 말하자마자 승무원들은 단호하게 탈출경로를 일러준다. 기장은 가라앉는 비행기 끝부분까지 확인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탈출한다. 그러나, 구명정에 탄 사람들은 일부, 많은 사람들은 가라앉는 비행기의 날개 부분에 서 있다. 제2의 구조가 없다면 얼음만큼 차가운 강물에 빠져들 것이라는 게 자명하다. 그런데, 수많은 배와 헬기가 그들을 구하러 왔다. 24분이었다. 그들 모두가 생존하는 데 걸린 시간, 비행기가 추락하고 그들의 발이 뭍에 닿기까지 겨우 ‘24분’이 걸렸다.

 

우리는 이 24분을 보며 봄, 4월 무력하게 침몰하는 배를 바라봐야 했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24분.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배가 기울고 마침내 가라앉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누구도 세월호를 떠올리라고 말한 적 없지만, 심지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세월호를 염두에 두었을 리 만무하지만 우리는 세월호를 떠올린다. 그게 어느새 우리의 집단 트라우마가 됐고, 그게 우리의 심정적 공동체의 중심 정서가 됐기 때문이다.

 

<희망난민>을 쓴 일본의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현대 일본 사회를 커뮤니티 사회라고 불렀다.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일본의 청년 세대가 커뮤니티에서 소속감과 승인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흐름은 일본의 과거 20년사를 따라간다고 한다. 그럴 듯하면서도 다르다. 세월호 사건은 그런 점에서 이 유사한 그래프 곡선을 완전히 훼절시킨 일이 아닐까 싶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세월호 커뮤니티에 살고 있다. 우리들 역시 과거 거품 경제가 꺼진 일본처럼 이를 테면 황금시대의 끝을 목도하고 있다. 아니 이미 목도했다. 영화 <국제시장> 세대가 가졌던 공통의 목표나 가치관 같은 것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흙수저, 헬조선과 같은 신조어가 우리를 반영하는 이 사회는 신분이나 가문이 운명을 좌우하던 전근대 사회보다 더 암울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시험이나 경쟁이 기회였던 순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경쟁만 있을 뿐 기회가 없다.

 

지금 우리는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이 있다, 현재의 나를 참으면 더 나은 나를 만날 수 있다와 같은 자기계발서에서 구매했던 ‘희망’과 결별하느라 몸살을 앓고 있다. 아니 그 ‘희망’이 값싼 도매 상품이었음을 깨닫고 있다.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이 없고, 더 나은 나를 만날 수 없다면 그건 내 탓이 아니라 애당초 사회의 매트릭스 때문이다. 좋은 학교를 가도 훌륭한 회사에 갈 보장은 더 이상 없다. 좋은 회사에 입사했다고 멋진 인생을 산다는 확증도 없다. 더 이상 선후관계가 인생의 인과관계가 되지 않는다. 그런 걸 희망이라 부르며 현재의 나를 참고, ‘가만히 있어라’, ‘참아라’의 확성기 소리에 참고, 견디며, 더 나은 다음을 기다릴 수는 없다. 확성기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어서는 안된다.

 

영화 <설리>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보자. 비행기가 회항할 가능성, 고가의 비행기를 최대한 보존할 수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교통안전위원회는 기장 설리를 힐난한다. 질문에 설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155는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다.” 어쩌면 여기에 건전한 보수주의자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말하고 싶은 휴머니즘의 본질이 있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사람을 숫자로 환원해왔다. 누군가의 아버지, 딸, 아내, 애인이 아니라 155명 중 한 명, 이런 식으로 말이다. 만약 보수주의가 지켜야 할 근본적 가치를 고수하는 태도라면 그 가치는 휴먼, 인간이 돼야 할 것이다. 경제적 이득이나 손실과 같은 숫자로 수렴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숫자로 다 담을 수 없는 그 무엇, 인간 말이다.

 

<설리>를 보며 우리 사회의 정서적 커뮤니티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많은 것이 희생자이고 가장 적은 것이 바로 휴머니즘이다. 책임질 수 있는 그 누군가가 다른 어떤 관점이 아니라 바로 사람을 숫자가 아닌 사람으로 보는 휴머니즘에서 판단한다면 세상은 조금 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재난의 커뮤니티에서 인간주의를 길어내는 것, 인간주의가 실종된 현재 <설리>가 우리를 심란하게 하는 이유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