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마음과 프로그래밍

“마음의 빚을 이용하자는 겁니다. 마음의 움직임이 가장 무서운 것 아니겠소.” 영화 <밀정>에 등장하는 의열단장 정채산은 적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마음을 이용하자고 말한다. 정채산의 말은 영화 <밀정>을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이다. <밀정>은 마음에 대한 영화인 셈이다. <밀정>에서 발견되는 마음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흔들리는 마음이고 두 번째는 변하는 마음이며 마지막 하나는 사랑하는 마음이다.

 

<밀정>은 이 중에서도 흔들리는 마음에 주목한다. 친일파가 됐다가 항일 운동지사를 돕다가, 왔다갔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영화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이문에 따라 몸을 옮기는 봉급생활자로 규정한다. 봉급을 더 주는 사람에게 몸을 바치는 것, 사실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상할 것도 없을 일이다.

 

영화 <밀정>의 한 장면.

 

두 번째 마음은 우리가 흔히 변심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동지의 정보를 팔아먹은 변절자는 왜 변심했느냐는 질문에 “변심이 아니라 작심이지”라고 대답한다. 마음이 있었는데 바뀐 게 아니라 새로운 마음을 먹었다는 의미다. 하긴, 동지와 조국을 배반하는 데 필요한 것은 같은 마음이 아니라 아예 다른 마음일 것이다. 그걸 같은 마음이라고 하기에는 마음의 결과 방향이 너무 다르다.

 

나머지 하나는 끝끝내 드러내지 못한 진심, 사랑이다. 드러내지 못한 사랑이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을 위험에 몰고 간다. 나라를 위한 충심과 연인을 위한 연심 중 어느 것이 더 무겁고 귀할까? 대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연심을 먼저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 속, 영화 속 항일지사들은 연심을 버리고 충심을 택한다. 둘 다 무겁고, 뜨겁고, 진실한 마음이다. 그 어려운 선택을 항일지사들은 해낸다. 연심을 버릴 정도니 자기에 대한 애착 따위는 있을 턱이 없다.

 

항일지사와 독립투사들의 뒤를 캐며 그 정보를 일본 경찰에 넘기는 정보원은 상해임시정부를 두고 이렇게 표현한다. “거지꼴을 한 자가 장관이랍시고 앉아 있고, 또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여기 저기 돈을 꾸러 다니는 일입니다.” 그렇다. 임시정부의 장관은 거지꼴을 하고 있지만 임시정부의 정보를 판 자는 일본 경찰의 간부가 되어 비싼 술과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녹봉을 받아먹는 일” 정도로 치부한다. 돈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면 마음은 우스워진다. 그 마음은 같은 마음이 아니다.

 

그런데,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올해 알파고가 이세돌 기사를 이겼을 때,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인공지능이 생각할 수 있는 기능 정도가 아니라 영혼을 가진 것은 아닐까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종종 SF 영화 속에서 마음을 가진 기계들을 본 적이 있다. 기계인지 인간인지를 구분하는 튜링테스트는 엄밀히 말해 인지능력에 대한 테스트이지 마음에 대한 테스트는 아니다.

 

하지만 마음은 무엇이고 생각은 또 무엇일까? 하버드대 스티븐 핑커 교수는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책에서 마음을 기계적으로 이해해보고자 했다. 핑커는 로봇에게 선한 마음을 입력하기 위해서는 많은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니, 애초에 선한 게 무엇인지를 규정하기도 어렵다.

 

AI는 알고리즘을 통해 프로그래밍된 것들을 실행한다. 2015년 영화 <엑스 마키나>에는 그림을 그리고, 언어를 활용할 줄 아는 AI 로봇 에이바가 등장한다. 에이바의 튜링테스트에 참가한 칼렙이라는 남자는 에이바가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을 하고 정서처럼 여겨지는 것을 연출하자 무척 혼란스러워한다. 그는 에이바를 만든 네이선이라는 과학자에게 질문한다. 혹시 에이바가 나를 좋아하도록 프로그래밍한 건가요?

 

질문에 대한 네이선의 대답이 의미심장하다. “프로그래밍? 그런 게 뭐지? 자, 당신은 어떤 여자 타입을 좋아하지? 흑인? 뭐 흑인이라고 치자. 하지만 그게 사회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게 아니라는 근거가 있나?” 생각해보면 그렇다. 우리가 주관이나 취향이라고 말하는 것들 혹은 이념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과연 선험적인 것인지 아니면 경험에 의해 축적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가령, 누군가 동성애자를 혐오한다면 그게 주변 사람들을 통한 사회화인지 오롯한 혼자만의 결정인지 구분하기 애매하다는 의미다. 우리가 교육이라 부르는 행위 전반도 프로그래밍과 다르지 않다.

 

결국 마음도 프로그래밍될 수 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마음대로라는 말이 자신의 의지나 사회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배우고 익히고 보는 것들이 모두 다 마음의 근거가 아닐까?

 

마음이 모듈처럼 프로그래밍된다는 것에 공포를 느낄 게 아니라 제대로 된 프로그래밍을 해야 한다. 어쩌면 인공지능이 우리보다 훨씬 일관되고 선한 마음을 갖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