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상투적 위안에 기대는 삶

<멜로드라마와 모더니티>를 쓴 벤 싱어는 멜로드라마를 특정한 시기에 대중의 인기를 전폭적으로 얻었던 영화 장르로 이해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방식, 즉 남녀가 만나 사랑하다가 뜻밖의 장애물을 만나서 헤어지는 로맨스의 하위 장르로만 생각하진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벤 싱어가 생각한 멜로드라마의 대중성은 이를 테면 소박한 대중의 소망이라고 받아들여도 될 듯싶다. “가혹하고 예측 불가능한 근대 자본주의적 삶에 놓인 개인의 무능력함을 극적으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 고차원적인 도덕적 힘이 여전히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그 정의로운 손으로 세계를 다스린다는 사실을” 전달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대중 영화에서 바라는 위안이란 이런 소박한 정의의 실현 아닐까? 현실에서는 자본이나 물질이 높은 차원의 도덕을 압살하기 일쑤지만 말이다.

 

10~11월은 사실, 한국 영화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비수기다. 특별한 대작이 개봉하지도 않고, 관객을 어마어마한 흡입력으로 유혹하는 ‘텐트폴’ 영화도 비껴간다. 그러다 보니, 소위 ‘아트버스터’라고 말하는 소소한 흥행 예술영화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의외의 화제작이 탄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흥행작이라는 게 대개 작고, 소박한 것이긴 하다.

 

영화 <럭키>(왼쪽)와 <형>의 한 장면.

 

이 비수기에 뜻밖의 흥행으로 주목받은 영화가 바로 <럭키>이다. 유해진 주연의 <럭키>는 현재 700만명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 손익분기점을 넘은지 벌써이고, 제작사나 배급사조차 이 정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을지 몰랐다는 평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들어 흥행에 성공하거나 관심을 끌었던 영화들 가령, <밀정> 같은 영화에 비해 <럭키>는 무척 소박하고 무엇보다 대중적이다. 코미디라는 장르도 그렇지만 하루아침에 사고로 인해 완전히 다른 처지에 놓인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갖게 된다는 서사도 좀 뻔하다.

 

전문살인청부업자였지만 기억상실로 인해 소박한 김밥집 아르바이트생이 된 형욱, 유해진이 맡은 이 캐릭터가 바로 영화적 웃음의 중심에 있다. 워낙 칼을 잘 쓰다 보니 쓸데없이 요리용 식칼로 오이 및 당근 장식품을 만들어내고, 한 땀 한 땀 김밥을 썰어내는 데 집중한다. 이런 대조와 불균형이 웃음의 핵심이라면 영화를 지탱하는 주된 도덕은 바로 결국 선이 악을 이긴다는 것이다. 대중이 원하는 세상 즉 사필귀정이 되고, 인과응보가 이뤄지는 세상을 소박한 웃음으로 제공한 것이다.

 

조정석과 아이돌 도경수가 형제로 출연한 <형>의 접근도 <럭키>와 다르지 않다. 전과 10범이 넘을 만큼 사기로 도를 튼 형이 오랜만에 동생을 찾아온다. 촉망받는 유도 선수였던 동생이 시합 중 사고로 실명하게 되자 그걸 빌미로 가석방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1년여의 감찰 기간을 채우기 위해 형은 억지로 동생과 동거를 시작한다. 다음은 대략 짐작이 가는 이야기 그대로이다. 마치 돈을 바라고 형을 찾아 온 동생이 진정한 형제애에 눈을 뜨는 <레인맨>처럼 <형>의 형 역시 물보다 진한 피의 진정성을 찾고, 제대로 된 형으로 거듭나게 된다.

 

<형>의 이야기 진행 방식은 전형적인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남녀 간의 사랑이 가족 간의 사랑으로 대체되었을 뿐,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과정에서 웃음이 빚어지고 그러다가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질 때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즉, 사랑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짐작하겠지만, 그 장애물은 곧 눈물의 씨앗이 되고 슬픔의 원천이 된다. <럭키>가 뻔한 웃음으로 위안을 준다면 <형>은 상투적인 눈물로 위로를 주려 한다.

 

문제는, 이런 뻔한 이야기가 때로는 대중과 관객을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대중, 관객이 뻔하다는 걸 몰라서가 아니다. 세상이 말도 안되는 피곤한 일들로 가득해지면, 사람들은 가족이나 사랑과 같은 조금은 뻔한 도덕적 테두리나 따뜻한 안식처를 찾는다. 아니, 그냥 믿어 버린다. 대중, 관객들이 나태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너무 고되기 때문이다.

 

인용했던 벤 싱어의 말을 좀 바꿔 보자면 너무나 가혹하고 예측 불가능한 정치, 경제가 개인에게 무력감을 줄 때, 관객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고차원적인 도덕과 힘이 여전히 지상을 내려다보고 그 정의로운 손길을 뻗쳐 세계를 다스릴 것으로 믿고 싶어 한다.

 

가족이 준종교적인 개량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 벤 싱어의 말처럼 그렇게 가족이 멜로드라마의 중심에 등장한다는 것은 지금 세상이 그만큼 피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방이 가로막히고, 역경과 고통에 사로잡힌 주인공들에 동화해서 눈물을 흘리고, 그 눈물 가운데서 회복을 꿈꾼다면 그만큼 세상이 엄혹하고 고단한 것이다. IMF 외환위기 때 등장했던 수많은 한국적 멜로드라마들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소박한 상투성에서 길어내야 하는 한 줌의 도덕과 그 도덕에 대한 희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위안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린 지금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