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메밀 시대


올해처럼 냉면이 화제가 된 적이 드물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오던 ‘노포’들은 물론이고, 새로운 냉면집들이 속속 등장했다. 냉면에 대한 새로운 시장층이 생겼다. 젊은이들이다. ‘밍밍하기만 한’ 평양냉면 육수의 맛을 음미하고 이해하려는 세대가 생겨난 것이다.

 

인터넷이나 방송을 통해서 ‘냉부심’(평양냉면의 맛을 안다는 자부심)이라는 말도 유행했다.

 

냉부심(?)의 기준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앞서 말한 특유의 육수 맛을 감지하는 것이다. 매콤 새콤하지 않고 부드러우며 알 듯 모를 듯한 풍미를 사랑하는 능력이다. 시쳇말로 ‘행주 빤 물’ 같다는 혹평의 그 육수가 맛있어지는 단계다. 다른 하나는 메밀 함량이 높은 면에 대한 애호다. 그동안 메밀 값이 비싸고 구하기 어려워서인지 평양냉면이라고 이름붙이고 실은 전분과 밀가루로 만든 면에 메밀은 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메밀 함량은 1920년대 한 신문에도 “평양냉면은 오직 메밀로만 만든다”는 탐방 기사가 실릴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배합법이다. 메밀은 실은 전국 어디서나 심어 먹던 작물이었다. 특히 비나 가뭄으로 농사를 망쳤을 때 좋은 대안이었다.

 

여름에 심어서 가을께 수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농사가 제일 중요했던 당시, 여름에 벼 포기가 픽픽 쓰러지고 메밀이라도 심을 수 없었다면 어떻게 가을과 겨울을 넘겼을까 끔찍한 일이다. 또 화전을 일구는 사람들에게 메밀은 아주 좋은 작물이었다. 쌀농사는 안되고, 거친 토질에도 ‘가루’나 ‘쌀’(메밀껍질을 벗긴 상태를 녹쌀이라고 하여 쌀의 대용임을 의미했다)을 주는 메밀의 효용은 상상 이상이다. 하나 시간이 흐르면서 메밀은 녹화사업 등의 목적으로 화전이 금지된 후 생산량이 줄어들고, 쌀과 밀가루가 풍부해지면서 더욱 하락세를 보였다. 시내 냉면집에서 전분에 보릿가루 태운 것을 섞어 가짜가 나왔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다. 메밀이 비싸서 생긴 일이다. 요즘은 비교적 싼 수입 메밀이 많아서 함량 자체는 많이 올라갔다. 그래도 메밀은 밀가루나 전분에 비해 고가의 곡물이어서 풍족하게 쓰기 어렵다.

 

올해 메밀 농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간다. 메밀은 이제 구하기 어려운 작물이 아니다. 잡곡으로서 매우 가치 있게 팔린다. 메밀을 많이 넣은 평양식 냉면의 인기 확산도 한몫한 듯하다. 메밀 산지는 세간에 알려진 강원도를 넘어서 전국에 분포하는데, 제주 메밀이 양도 질도 충족시키고 있다. 다만 경관작물이라고 하여 메밀꽃 피는 환상적인 광경을 보기 위해 연작을 장려하다보니 알곡이 작아지는 등 메밀 자체의 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한겨울에는 꼭 평양 같은 관서지방이 아니어도 메밀로 전병 부치고 수제비를 뜨던 음식문화가 있었다. 메밀이 가장 맛있을 때가 수확 지나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꼭 냉면이 아니어도 시식(時食)으로 메밀을 다채롭게 먹을 수 있다. 우리 민족 음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메밀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면 좋겠다. 아아, 한겨울 메밀묵 장수가 팔던 걸 사서 신김치 얹어 먹고도 싶다. “메밀무욱! 찹싸알떡!”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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