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문지혁의 미니픽션

[미니픽션] 12월 31일


 



“이 노래가 오늘의 마지막 곡입니다. 굿 나잇, 앤 해피 뉴 이어.”

 

무대에서 연주를 하던 재즈밴드의 리더가 말했다. 소란스럽게 떠들던 사람들은 마지막 곡이란 말에 시선을 돌려 박수로 곡을 청했다. 나는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장실에 갔던 그녀가 돌아오고 있었다.

 

*

 

그날 밤, 맨해튼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빌딩 꼭대기의 재즈 바는 손님으로 가득했다. 밴드의 경쾌한 음악과 사람들의 요란한 웃음, 그리고 마주 앉은 남녀 사이마다 흐르는 묘한 분위기가 유리로 둘러싸인 바에 앉은 이들의 체온을 얼마쯤씩 상승시키고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나는 자꾸만 목이 탔다. 폐점시간은 이제 5분도 남지 않았다. 그 말은 2010년 역시 5분도 남지 않았다는 거였고, 말하자면 고백의 제한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마치 1:0으로 지고 있는데 후반 인저리 타임으로 넘어간 축구팀의 공격수 같은 심정이었다. 준비해온 무언가를 말해야 했다. 아니, 준비하지 않은 말이라도 뭔가 해야만 했다.

 

“나중에 사귈 사람은 어떤 남자였으면 좋겠어?”

 

맙소사, 실축. 나중에 사귈 남자가 어떤 사람이었으면 좋겠냐고? 골문은 그쪽이 아니다. 마침 들려오는 드럼의 화려한 필인(fill-in)이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거센 야유처럼 느껴졌다.

 

“오빠 같은 사람이면… 좋겠어요.”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잘못 찬 볼을 멋지게 다시 내게 패스해주었다. 그래, 그녀는 나를 좋아한다. 나도 그걸 알고 있다. 문제는 나도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짝사랑이 온전한 하나의 사랑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고백이라는 잔인한 통과의례를 필요로 한다. 그게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나는 다리에 쥐가 나기 직전이었다.

 

“그건 안 돼.”

 

설상가상이라더니. 나는 스스로의 입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날갯짓을 하며 스쳐가는 어두운 그림자.

 

“왜요?”

 

“왜? 왜냐하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였다. 후우. 심호흡이 필요하다.

 

“내가 널 좋아하거든.”

 

흔들리던 눈빛이 요동쳤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골대를 향해 힘껏 볼을 찼다.

 

“그러니까 나중에 사귈 사람은 나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어. 난 이제부터, 지금 니가 사귈 사람이 될 테니까.”

 

말이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도 모른 채 나는 계속 주절주절 괴변을 늘어놓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도 내 말을 별로 주의 깊게 듣는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그저 못 믿겠다는 표정을 한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을 뿐.

 

그녀가 울먹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말을 멈추고 그녀 옆자리로 옮겨 앉아 가만히 손을 잡았다. 그녀의 작고 하얀 손이 내 손 안에서 길 잃은 아기 새처럼 바르르 떨었다. 나는 그녀의 손 위아래로 내 두 손을 포개고는 귀에 대고 말했다.

 

“지금 잡은 이 손, 놓지 않을게.”

 

순간 다시 드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곡의 마지막을 알렸고, 그 위로 테너 색소폰의 엔딩이 겹쳐졌다. 테이블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와 함께, 브라보!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나는 마치 온 세상이 우리에게 하는 말처럼 들려 괜스레 뿌듯했다.

 

*

 

5분 후, 우리는 빌딩을 빠져나와 손을 마주 잡은 채 어둠에 잠긴 미드타운을 걸었다. 그새 날짜가 바뀌었고, 두 명의 솔로가 사라진 대신 한 쌍의 커플이 탄생했으며,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 하나의 경기가 끝났지만, 동시에 또 다른 경기가 시작되었다. 인생이란 경기에서 한 경기가 끝났다고 샤워할 시간 따위를 기대하는 것은 금물.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새로운 경기장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이번엔 좀 더 나은 플레이를 펼치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