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문지혁의 미니픽션

[미니픽션] 오랜 침묵 후에



 

 

1

 

 

그날 밤 우리는 소호 뒷골목의 어느 좁은 찻집에 앉아 있었다. 어두워질수록 탁해진 공기가 실내를 맴돌았다. 그녀는 조금 취한 듯 했고 나는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군데군데 밝혀놓은 촛불에서는 향냄새가 났다.

 

“괜찮아?”

 

“…어.”

 

그녀의 목소리는 속으로 대답하는 것처럼 작고 희미했다. 나는 속이 탔다. 정확히 삼십칠 분 전에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탓이었다. 널 사랑해. 믿기 힘들겠지만 정말이야. 수십 번도 넘게 연습한 말은 오래 씹은 껌처럼 입에 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잠깐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술을 주문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삼십 칠 분 동안 네 개의 술병을 비웠다.

 

“볼펜 있어?”

 

“응?”

 

“펜 있냐구.”

 

뜬금없이 그녀는 펜을 찾았다. 가방을 뒤져 펜을 건네자 그 다음엔 냅킨을 한 장 뽑아 들더니 무언가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여자는 나라는 사람의 존재를 조금도 의식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듯 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볼펜을 달라는 말처럼 쉽게 꺼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무안해졌고 그 무안은 내면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분노로 변해갔다. 고백에도 유효기간이라는 게 있다면 이제 내가 한 고백은 막 상해가려는 참이었다. 어느새 삼십구 분 째였다.

 

“그럼 난 갈게. 천천히 와.”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분노와 무안, 좌절과 혼란이 엉킨 얼굴로 하얗고 희미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굴은 냅킨을 내밀며 속삭이듯 말했다.

 

“읽어봐.”

 

그녀가 건넨 것은 한 편의 시였다. 얇은 냅킨 위에 이어진 꾸불꾸불한 글자들은 내 마음처럼 어지러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아 그것을 읽었다.

 

 

After Long Silence

 

Speech after long silence; it is right,

All other lovers being estranged or dead,

Unfriendly lamplight hid under its shade,

The curtains drawn upon unfriendly night,

That we descant and yet again descant

Upon the supreme theme of Art and Song:

Bodily decrepitude is wisdom: young

We loved each other and were ignorant.

 

 

“뭐야?”

 

“좋아하는 시.”

 

“누가 쓴 건데?”

 

“예이츠.”

 

그녀는 웃었지만, 나는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한 사람의 진심이 이런 식으로 우스워지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고백을 했고, 그렇다면 결과는 받아들여지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했다. 내가 원한 것은 확실한 대답이지 의미 없는 선문답이 아니었다.

 

“시 좋네. 갈게.”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돌아섰다. 둔기에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쓰러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발을 옮기려는데 등 뒤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삶의 아이러니가 뭔지 알아?”

 

달려 나온 그녀는 비틀거리는 내 얼굴을 붙잡고 키스를 퍼부었다. 나는 그녀가 냅킨에 글을 쓰고 있을 때보다 더한 당혹감을 느꼈다. 그녀를 밀쳐내지도 끌어안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그만 계산서를 들고 나온 웨이터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2

 

 

“말하자면 스포츠카의 아이러니 같은 거구나.”

 

“스포츠카?”

 

“젊을 때는 누구나 스포츠카를 타고 싶어 하지. 하지만 스포츠카들은 대부분 비싸잖아. 그래서 그걸 살만한 돈을 모으려면 어느새 젊은이는 중년의 남자가 되어 있어. 젊음이 있을 땐 돈이 없고, 돈이 있을 땐 더 이상 젊음이 없고.”

 

그녀가 웃었다. 내 이야기에 웃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어두운 찻집엔 손님이 없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두 행이 마음에 들어. 젊을 때 우리는 사랑하였으나, 무지하였다—”

 

그녀는 술잔을 들이키며 말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사랑도 그런 거겠지. 사랑을 할 수 있을 땐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땐 더 이상 사랑할만한 젊음도 아름다움도 없다는 것…… 스포츠카처럼.”

 

“어쩌면 그럴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왜 이런 시를 보여주는 걸까. 이것이 내 고백에 대한 완곡한 거절의 뜻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자 두려웠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내가 말했다.

 

“왜 나한테 이걸 보여준 거야?”

 

그녀는 머뭇거렸다. 잠깐인가, 당황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술을 더 시켰다.

 

“날 사랑한다고 말한 거,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한참 후에야 그녀가 말했다.

 

“무슨 뜻이지?”

 

“궁금해. 왜 날 사랑하는지.”

 

“그냥, 좋으니까.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딨겠어.”

 

“그 좋다는 느낌을 어떻게 믿지?”

 

“자꾸 왜 그래? 내가 그렇게 싫어?”

 

“아니, 싫어서가 아냐. 확인하고 싶은 거지. 이상하지 않아? 왜 사람들은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자꾸만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건지. 난 그게 이상해.”

 

“그래서?”

 

“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자주, 빨리 일어나는 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이래. 요구가 해결책을 발명한 거지. 사랑할 만한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가 사랑에 빠진다고 생각해? 아니, 절대 아냐. 오히려 그 반대지.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거야. 사랑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 현실 속의 특정한 인물을 통해 구체화되는 거라구.”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다시 말하면 난 그저 사랑을 하고 싶은 네 욕망이 투사된 대상에 불과하다는 거지. 꼭 내가 아니라도 넌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을 거란 말이야.”

 

그건 동의할 수 없었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여자 외에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으니까. 난 그녀의 말에 화가 났고, 그래서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 챙겨둬. 이 시는 일종의 암호 같은 거니까.”

 

두 병을 더 마신 그녀의 눈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언젠가 우리가 더 나이가 들면 이 시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때까진 이걸 가지고 있어.”

 

그녀는 고개를 파묻은 채 일어나지 못했다. 가게의 영업시간이 끝나자 나는 정신을 잃은 그녀를 데리고 나와 택시를 탔다. 그녀와 나는 허드슨 강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었다. 조지 워싱턴 브리지를 향해 달려가는 옐로우 캡 안에서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3

 

 

뉴저지 포트리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하늘에는 별인지 인공위성인지 모를 불빛들이 가득 빛나고 있었다. 거대한 다리를 향해 걸으며 나는 긴 꿈을 꾼 것 같다고 생각했다. 꿈이 아닌 것을 확인하듯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냅킨을 꺼내 그녀가 적어준 시를 소리 내어 읽었다. 긴 침묵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화자는 누구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스페니쉬 버스를 탈까, 아니면 그냥 걸을까 고민하다 나는 조지 워싱턴 브리지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트럭과 트레일러들이 달리는 어퍼 레벨은 시끄러운데다 심하게 흔들려서 마치 물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다리 아래로 유유히 흐르고 있는 허드슨 강을 내려다보며 걷던 나는 중간쯤에 멈추어 섰다. 왼쪽에는 내가 살고 있는 맨해튼이, 오른쪽에는 그녀가 살고 있는 뉴저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지금쯤 잠이 들었을까. 고백에 대한 대답은 언제쯤 들을 수 있는 걸까.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 어디쯤에 켜진 등을 바라보다, 나는 주머니에서 냅킨을 꺼내 조심스레 강 아래로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