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문지혁의 미니픽션

[에세이] Happy, New, Year





오늘 맨해튼에 약속에 있어 나갔다가, 나간 김에 록펠러 센터에 들렀다. 42가 버스터미널에서 브라이언트 파크를 지나 다시 5번가를 따라 올라가는데 어찌나 사람이 많던지. 꼭 앞에까지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밀려 밀려 트리 앞 아이스 링크까지 가고 말았다.

 



이것도 기념이다 싶어 북적이는 사람들 머리 위로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으며 다가갔는데, 막상 맨 끝에 이르러 아이스링크를 내려다 본 순간 허무해지고 말았다. 텅 빈 아이스링크를 따라 말없이 돌고 있는 청소용 차량. 모두가 고개를 내밀고 내려다보고 있던 건 그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사는 게 그렇다. 한참을 기대하고 기다리다가도 뚜껑을 열어보면 허무해지는 것. 뭔가 있겠지 하고 다가가지만 결국 마주하고 나면 별것 아닌 것. 삶이 전부 다 시시하고 재미없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우리의 짐작과는 늘 다르다는 얘기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여기도 새해가 된다. 한국 나이로 서른 셋, 만으로는 아직 서른하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 삶을 규정하는 것은 숫자이므로. 좋든 싫든 우리는 숫자에 매여 있다. 그걸 모른다면 순진한 거고, 모른 척 한다면 기만하는 것.




도무지 수치화할 수 없는 불가해한 삶을 견뎌내기 위해 우리는 애써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런 다음 어떻게든 그것을 해독하기 위해 애쓴다. 숫자로 인해 좌절하고, 상처 받으며, 때론 기뻐하고 아주 가끔 위로받으면서. 우리는 삶의 목표를 숫자로 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숫자의 의미를 폄하하며 이 비루한 삶 어딘가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는 척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거야, 라고 페이스북에 적어 넣는 행위 이면에는, 그 글자들을 이진법으로 바꾸어 타인의 스크린에 표시하는 0과 1이라는 숫자가 있다.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 모두는 이 끝없는 숫자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무기수인 것이다.

 



이제 나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어간 윤동주의 나이를 넘어, 뉴욕삼부작을 쓰던 폴 오스터를 넘어, 그리고 나를 낳았을 때의 아버지를 넘어 새로운 숫자에 도착했다. 공생애를 마친 예수의 서른셋은 어땠을까? 서른셋이라는 숫자 말고는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은 지금,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여기-오늘을 살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소원해 본다. 레이먼드 카버 식으로, 모두에게 복된 새해가 되기를. Happy, new, year.




2010. 12.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