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브로맨스의 위계

영화 <천문>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최근에 개봉했던 영화들 가운데 브로맨스가 눈에 띈다. 브러더와 로맨스의 합성어인 이 신조어는 남자들끼리의 우정 그 이상을 내포한다. 대개 두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끈끈한 연대감을 가리키는데 설경구와 임시완이 주연을 맡았던 <불한당>이나 황정민과 이성민 주연의 <공작>에서 발견되는 끈끈한 동지애를 생각하면 된다. 남자들이 떼로 나와 나름의 세계를 보여주는 <범죄와의 전쟁>이나 <신세계> 같은 영화와는 다른, ‘정서’가 깔린 두 남자 이야기, 감정을 주고받는 버디 영화를 브로맨스 영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2019년 말 개봉했던 영화 3편에 바로 이 브로맨스가 흐른다. 순제작비 260억원이라는 한국형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 <백두산>의 리준평(이병헌)과 조인창(하정우), 세종과 장영실의 20여년을 그린 영화 <천문> 그리고 마지막 작품은 새로운 미디어플랫폼의 강자로 떠오른 넷플릭스의 영화 <두 교황>의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이다. 중요한 것은 3쌍의 유대감, 그 밑바닥의 정서와 교감을 따지자면 그 브로맨스에 위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낮은 브로맨스가 있다면 상대적으로 훨씬 더 수준이 높은 브로맨스가 있는 셈이다. 브로맨스라고 해서 다 똑같은 브로맨스가 아니다.

 

<백두산>의 리준평과 조인창이 공감을 나누는 밑바탕은 바로 ‘가족’이다. 조인창은 남쪽에 사랑하는 아내와 아직 성별도 모르는, 출산 예정의 아이가 있다. 전역하는 날 잔인한 운명의 게임처럼 대위 조인창은 백두산 폭발을 맞게 된다. 군인이라 명령 때문에 북에 가지만 그 명령을 끝까지 수행하는 동력은 바로 가족이다. 그가 4차 마그마방 폭발을 막아야만 남쪽의 가족이 살아남을 수 있다.

 

북의 공작원 리준평의 동력 역시 가족이다. 아내는 이미 망가진 상태이지만 리준평에게는 딸이 있다. 자기 목숨만 구하고 도망칠 수도 있겠지만 딸을 살려야만 한다. 리준평과 조인창은 하나의 언어를 쓰는 한민족이라는 점에서 소통하지만 결국 가장, 아버지라는 점에서 교감한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건네는 말은 가장과 아버지로서 서로를 신뢰한다는 간증과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의 정예요원을 움직이는 것은 국가나 민족 같은 거대한 이념이 아니라 자신의 유전자를 보존하려는 아버지의 이름이다.

 

그에 비해, 세종(한석규)과 장영실(최민식)의 공감은 좀 더 복잡하다. 세종은 왕이고 장영실은 천민 출신이다. 감히 얼굴도 맞대기 어려운 신분의 격차를 넘어 두 사람이 독대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것은 꿈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상이한 종류의 인간들로 구성될 때 도시가 강해진다”고 말했다. 어떤 점에서 세종이 성군이라면 이처럼 상이한 종류의 인간들로 구성된 궁을 만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따지자면 장영실은 만드는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이고 세종은 호모 크리에이트(Homa Create), 창조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를 뜻하는 크리에이트는 원래 신에게만 허용된 단어였다. 신만이 창조할 수 있고, 인간은 그저 만들어내는 기술자 내지는 노동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감히 세종은 고유한 언어와 독자적인 천문학을 갖고자 했고, 그것을 창안해냈다. 세종이 창조한 것을 장영실이 기술로 실현해낸 것이다.

 

두 사람의 작업은 개인적인 이기심을 넘어 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헌신과 닮아 있다. 장영실이 별다른 뜻이 없는 단순한 기술품, 안여의 고장으로 인해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마치 <백두산>에서처럼, <천문>에도 세종과 장영실 역시 장애물 너머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두 사람은 이념적 창조물을 실현하기 위해 협력했고 서로의 헌신을 이해하는 자들로 고통을 나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뼈저리게 느끼며, 공감한다.

 

그런 측면에서 <두 교황>의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는 전혀 다른 얘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넓힌다. 정통주의자인 베네딕토 16세는 클래식을 좋아하고, 청량음료를 즐긴다. 개혁주의자 프란치스코는 축구를 즐겨 보며 술을 즐긴다. 동성결혼, 이혼한 사람들의 영성체, 라틴어 사용 등 교리의 해석과 그것의 실현에 대해서는 두 교황 사이 아무것도 일치하는 게 없어 보일 정도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세상에 새로운 교황을 보내어 이전 교황의 잘못을 시정한다”는 자기반성과 “약점이 있어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약점을 보여주셨으니 주님께서 강인함을 주실 거예요”라며 그 반성을 지지한다. 두 교황의 대화는 신의 언어를 기록한 성경의 말씀으로 이어지지만 결국 세속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대개의 평범한 사람의 삶에 지침이 되고, 깨달음을 준다. 두 교황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실수하고 이를 속죄하고, 반성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위대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다름 가운데서 용서와 이해, 속죄를 발견하고, 이 까다로운 세상을 살아갈 유일한 근본으로서의 신의 말을 소개한다. 두 교황은 아무것도 창조하지도, 그렇다고 누군가의 아버지이거나 가장도 아니지만 세상과 신의 중개자로서의 깊은 교감을 나눈다. 단 하나의 액션신도, 격렬한 말다툼도 없지만 천천히 걷고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면, 새삼스럽게 공감, 세속의 두 남자의 이야기에도 여러 차원이 있음을 알게 된다. 브로맨스에도 위계가 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