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싸움·투쟁이 아니라 공감·이해하자는 것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82년생 김지영>이 개봉했다. 개봉 전부터, 아니 책 출간 이후로 내내 말이 많았다. 간혹 들러 보는 게시판에서, 나름 정치적 견해나 의견이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게시판에서도 <82년생 김지영>을 노골적으로 폄훼하고 조롱하는 게시글을 볼 때가 있었다. 화가 나고 억울하다기보다는 위축되고 서운했다. 그렇게까지 폄훼할 요소가 있을까? 남성을 적시하자거나 넘어서자거나 무너뜨리자는 그런 과격한 데가 없는 작품인데, 어떤 부분이 그렇게 화나게 만들었을까 의아했다.


결국 영화로 제작되어 개봉했다. 겉으로 느껴지기에는 영화가 대화의 소재가 되었다거나 지금껏 여성 편향적인 작품으로 오해했다는 온정적 분위기로 영화가 소비되는 듯싶다. 하지만 게시판 분위기는 여전하다. ‘82㎏ 김지영’이라는 낯뜨거운 호명이 원작의 이름을 대신하기도 한다. 다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무엇이 그렇게 불편한 것일까?


<82년생 김지영>은 12세 관람가이다. 영화를 본 12세 소녀는 엉뚱한 감상평을 남겨 내게 웃음을 안겼다. “정신병에 걸린 아내를 남편이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서, 다 낫게 하고, 다시 행복을 찾는 이야기”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다. 영화 속 김지영은 어느 날 갑자기 ‘질병’을 얻는다. 먼저 발견한 남편은 차마 아내에게는 말하지 못해 전전긍긍한다. 그러다 친정어머니가 알게 되고, 눈물을 흘린다. 한 번도 누나라고 부르지 않던 남동생이 팥빵도 챙겨오고, 누나 김지영은 “아프니까 누나 소리도 듣네?”라며 아무렇지 않지만 서글픈 표정으로 웃는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 가족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이던가? 노희경 작가 원작의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2011)>, 정우성·손예진 주연의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드라마였던 김희애 주연의 <완전한 사랑(2003)>처럼 말이다. 예로 든 영화들은 “부잣집에 시집간 영애가 남편 시우와 함께 시아버지로부터 내쳐져 살다 결국 불치병에 걸리면서 일어나는 일”, “영원히 반복될 것만 같았던 일상에 찾아온 엄마, 아내, 누나의 불치병” 등으로 요약된다.


물론 차이는 있다. 가족만 알던 여성들이 부지불식간에 육체적 질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는 새드엔딩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병에 걸린다는 것, 그 병으로 인한 가족멜로드라마라는 사실은 다르지 않다.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질병의 성격이다. 육체적 질병이 아닌 ‘빙의’라는 정신질환에 걸렸으니 말이다. 두 번째 차이점이 더 근본적인데 빙의, 정신질환이 개체 내의 신체에서 원인을 찾는 질병이 아니라 사회적이며 환경적인 질병이라는 것이다.


빙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장 과정과 주변 환경 등 사회적 요인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 김지영 생애의 보고서적 재연은 그런 의미에서 빙의라는 정신질환에 대한 일종의 해부학적 접근이자 원인 분석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1남2녀 중 둘째 딸로 살아왔던 일생의 흔적 자체가 김지영의 정신적 균형감을 흔들었을 수도 있다는 추론, 그 추론 위에 소설과 영화의 이야기가 있으니 말이다.


엄밀히 말해, 나는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첫째 딸 김은영에 더 가깝다. 그래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고, 할 말은 하며 사는 제법 존중받는 맏딸로 커왔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며 내내 떠올랐던 것은 김은영 동생 김지영처럼 내 이름과 한 글자 다른 이름을 가진, 자기 주장이 센 언니와 외아들이던 동생 틈에 끼어 자란 둘째 여동생이었다. 돌이켜보면, 여동생은 늘 착한 딸이었고, 동생이고, 누나였다. 싸우기보다 양보했고, 화내기보다는 혼자 삭였다. 세상엔 그런 여성들이 있다.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회사에서, 동아시아의 가부장제 가운데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내면화하고, 숨기는 쪽으로 성장해온 여성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엔 수많은 김지영들이 있고, 그런 김지영을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캐릭터화해 세상에 드러냈다.


영화 속 정유미가 주연을 맡은 김지영은 누군가를 향해 화를 내거나, 주장하지 않는다. 치료를 받기 시작한 이후, 커피를 쏟은 그녀를 보고 누군가 맘충이라 비난을 할 때, 그때서야 처음 속엣말을 내뱉는다. 그 비판의 대상엔 남성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아직 김지영의 입장이 되어 보지 못해, 마치 남의 일처럼 바라보고 있는 여성도 포함되어 있다. <82년생 김지영>이 목소리를 내는 쪽은 남자 혹은 아버지, 남동생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구조적 모순이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헬프>에서, 흑인 가정부 에이블린은 자신을 멸시하는 백인 여성 힐리에게 똥이 든 케이크를 선물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영화적 판타지로서 복수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은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것을 판타지로 제시한다. 애초에 <82년생 김지영>은 누군가를 적으로 가정하고 만든 복수의 드라마가 아니다.


<82년생 김지영>이 원하는 것은 싸움이나 투쟁이 아니라 공감과 이해이다. ‘그 정도 일로 빙의라니’라는 비아냥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구나’라는 공감의 시선, 우리가 문학과 영화를 통해 세상을 접하는 가장 큰 까닭이 바로 공감 아닐까? 다른 인격, 다른 성별, 다른 종교,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해볼 수 있는 공감의 장, 이야기는 원래 그런 것이니 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