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계단, 비극 그리고 유머

“반드시 우는 사람이 있어야 나머지 사람들은 더 실컷 웃을 수 있다.” 도미니카에서 태어난 크레올 작가 진 리스의 소설 <한밤이여 안녕>의 한 구절이다. 크레올은 식민지에서 태어나거나 살았던 본토민을 이야기한다. 진 리스는 영국인이었지만 도미니카에서 태어났기에 영국인으로부터 멸시받았다. 소설 <제인 에어>의 미친 아내가 바로 그 크레올이다. 크레올은 멸칭으로 사용되었다. 


영화 <조커>의 한 장면.


웃음을 무해한 해방이라 여기지만 어쩌면 웃음은 타인의 고통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일지도 모르겠다. 슬랩스틱 코미디언들이 넘어지고, 얻어맞고, 예측 불가능한 사고를 당할 때, 그 순간이 바로 웃음의 포인트가 된다. 자타공인 못생긴 코미디언들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자학적 개그를 던지면 관객들은 웃는다. 다른 여성 소설가 앤절라 카터의 말처럼 타인에게 일어나는 비극이야말로 나에겐 희극일 수 있는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여기 세 개의 비극이 있다. 하나는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였어”라고 말하는 <조커>이고, 다른 하나는 행운의 연속으로 술술 풀려가던 코미디인 줄 알았는데 비극이 되고 마는 <기생충>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18년 칸에서 상영되었던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다. 공교롭게도 이 세 작품은 모두 빛과 어둠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양극화된 두 계층을 목도하고, 결국 그 안에서 폭력으로 세상과 대결하는 인물들을 그려내고 있다. 바야흐로 21세기, 최근, 우리 사회의 공적 갈등은 바로 양극화의 세상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계단의 상징성이다. <조커>와 <기생충>에는 공교롭게도 데칼코마니처럼 이야기의 주요한 시점에 ‘계단’이 등장한다. 눈길을 끄는 것은 계단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사용법이 완전히 반대라는 점이다. 계단을 기점으로 두 영화 모두 이야기의 톤과 장르, 결말이 바뀐다. 껍질을 벗고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중심에 바로 계단이 있는 것이다. 


<조커>의 아서 플렉은 집에 갈 때마다 힘겹게 긴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시몬 베유의 말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데엔 우리의 몸을 무겁게 끌어당기는 중력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훨훨 가볍게 나는 은총의 힘이 있다. 아서 플렉이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방향성으로 보자면 그는 올라가지만 은총은 없고 무겁게 종아리에 매달리는 중력만 보일 뿐이다. 커다란 광대의 신발처럼 그는 삶이라는 무게를 온몸에 달고 무겁게, 무겁게 계단을 올라간다. 


그러나 그가 계단을 내려오는 순간 음악은 무거운 현악기의 저음을 벗어나 경쾌한 록앤드롤로 바뀐다. 이는 관객의 귀를 통해 들어오지만 실상 아서 플렉에서 조커가 된 그의 귀에서만 들리는, 내면의 소리이기도 하다. 즉, 계단을 오를 때마다 억눌러야 했던 그의 본능을 드디어 드러내고 폭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제, 걸음은 하늘로 튀어 오를 듯 가벼워지고, 그의 움직임은 춤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정상인의 삶을 아예 포기하고, “그렇지 않은 척을” 하며 살아가는 연기를 포기하자 그는 가벼워진다. 자기만의 리듬을 갖게 된다.


말하자면 참을 수 없이 폭발했던 웃음은 그렇지 않은 척 살아가야만 했던 그의 내면과 해결할 수 없이 쌓여 갔던 분노와 외로움, 서러움의 누출이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유머란 억압된 충동의 방출이며, 억압의 이완이다. 그러나 아서 플렉의 방출 기제는 고장 나 있었고 사회적으로 교환될 번역이나 코드화 작업이 이뤄지지 못했다. 그는 유머를 배우고 싶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른 부분에서 웃고, 그가 웃자 모든 사람이 웃음을 멈춘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십이야>의 광대처럼, 허락된 광대는 위험하지 않지만, 허락되지 않은 광대는 해가 된다. 허락되지 않은 광대가 되자마자 그는 존재한다. 이 아이러니 위에서 조커의 삶은 희비극이 된다. 


한편 <기생충>의 가족사기단은 비탈길을 유유히 거슬러, 상류층 계단을 올라간 듯했지만 한 차례의 폭우로 그 모든 것이 쓸려 내려간다. 빗물에 휩쓸려 도시의 부유물들이 낮은 곳으로 모이듯, 폭우가 쏟아지던 날 가족은 그렇게 본래 살던 곳, 서식지로 쏟아져 돌아온다. 돌아오는 과정에서 그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데, 물에 젖은 옷과 몸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수석이 물에 가라앉듯이, 잠시나마 중력에서 벗어나 더 높은 곳에 갔다고 착각했던 그들은 결코 발에서 뗄 수 없는 무거움을 확인하고 만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그들의 삶은 희극이 아니라 비극이라는 사실이 점차 선명해진다. 아니 희극이라 믿고 싶었던 삶이 비극으로 드러난다. 


어쩌면 우리는 희극이 불가능한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상의 억압을 풀어낼 유머가 세상에 통하지 않는다. ‘웃기는 일’이 유머러스한 일이 아니라 어이없고, 엉뚱한 일, 이해할 수 없는 일로 통한다. 타인의 고통을 통해서만 웃을 수 있다면, 이미 유머는 폭력의 유사어에 불과하다. 저마다의 고통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상대적 결핍과 만인의 만인과의 투쟁, 쫓고 쫓기는 질주만이 남아 있다. 유독, 달리고 또 달리는 <조커>의 아서 플렉이나 빗물보다 더 빠르게 집으로 내려가야 했던 <기생충>의 가족들처럼, 유일하게 허락된 유머는 그렇게 멀리서 보면 우스꽝스러운 질주뿐이다. 


엘리엇의 장시 ‘황무지’에는 마치 조커처럼, 한쪽 귀에서 다른 쪽 귀로 번지는 웃음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그런 웃음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리고 한 번쯤은 그런 웃음을 필연적으로 갖게 된다. 그것은 바로 해골의 입모양이다. 한쪽 귀에서 다른 쪽 귀까지 찢어진 웃음은 해골의 웃음밖에 없다. 죽어서야 그렇게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비극일 테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