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의 미술소환

비너스와 아도니스

 
마를렌 뒤마, 비너스와 아도니스, 2015-2016, 종이에 잉크워시, 메탈릭 아크릴, 22 x 17.5cm, 근렌스톤 미술관 소장 ⓒMarlene Dumas

 

왼손으로 눈을 가린 자의 검은 입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슬픔의 심연으로 그를 조용히 끌어내린다. 종이 위에 툭 떨어진 검은 잉크가 흐리게 번져나가면, 좀처럼 진정할 수 없는 슬픔도 종이 사이로 깊이 스며든다.

“앞으로 사랑에는 슬픔이 뒤따르리라. 질투도 동반하리라. 사랑은 처음에는 달콤하나 나중에는 쓰디쓰리라. 변덕스럽고 거짓되고 속임수로 가득하리라. 사랑은 가장 정직하게 보이면서도 사실 가장 위선적이요, 가장 순종적이면서도 사실 가장 고집불통이 되리라. 사랑은 전쟁과 끔찍한 사건들의 원인이 되리라.”

아도니스의 죽음 앞에서사랑에 대한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쏟아낸 비너스는 화가 마를렌 뒤마의 손끝에서 그림자처럼 어두운 대신 숨길 수 없는 강렬한 존재감을 두른 채 등장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나 성장한 뒤, 네덜란드로 이주하여 활동하고 있는 마를렌 뒤마는 셰익스피어의 산문시 ‘비너스와 아도니스’ 네덜란드 번역본의 삽화 작업을 의뢰받은 후, 그가 표현해야 하는 비너스의 이미지에 대하여 긴 시간 고민했다.

미술의 역사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비너스가 금발에 풍만하고 부드러운 곡선이 돋보이는 미인이라면, 뒤마가 삽화 33장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비너스는 성별도, 인종도, 미모에 대한 가치판단도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모습이다.

셰익스피어가 비너스의 충실한 연인으로 알려져 있는 아도니스를 사랑보다 사냥에 매료되어 비너스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자로 해석하면서, 당대 귀족사회에서 도구화된 결혼과 사랑, 금기시된 여성의 욕망을 다루었던 것처럼, 뒤마는 사랑의 신 비너스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외모의 전형성을 떨쳐내면서 사랑의 위계와 에로티시즘, 정념과 권력에 대한 솔직한 장면들을 펼쳐 보인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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