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비현실적이면 어때… 스크린 속 세상인데

▲ “판타지는 영화가 주는 위안
실종된 아이가 끝내 돌아오지 않는
어두운 현실의 재연보다
거짓 ‘해피엔딩’이 끌리는 이유”


최근에 하게 된 생각 중 하나는 리얼리즘에는 체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리얼리즘이란 냄새나고 어두운 세상을 사실 그대로 비추는, 좁은 의미의 리얼리즘이다.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를 예로 들 수 있다. 영화 속에서 김미진(서영희)은 살인자 지영민(하정우)이 집을 비운 사이 탈출에 성공한다. 죽을 힘을 다해, 골목 끝 구멍가게에 닿은 김미진은 겨우 안심하고 가게 안 쪽방에 몸을 누인다. 그런데, 그때 경찰서에서 풀려난 지영민이 마침 담배를 사러 그 가게에 들르고, 공포에 몸서리치는 주인 아주머니의 푸념을 듣게 된다. 미진은 결국 그곳에서 지영민과 마주쳐 목숨을 잃는다. <추격자>는 그녀를 사실적으로 처리한다. 납치된 여자가 탈출에 성공하는 이야기? “그런 건 ‘영화’에나 나와”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말 그대로, 리얼리즘이다. 우리는 지금껏 숱하게 탈출이 불가능한 현실을 목도해왔다. 겨우 112에 전화를 건 여성에게 경찰은 납치된 곳의 주소를 물었다. 부부싸움이라고 단정해버렸다. 현실이 이런 형국인데, 영화에서만 납치된 여성이 멀쩡히 살아 돌아오고, 살해되기 직전 구출당하는 건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영화적 눈속임으로 덮기엔 현실의 악취가 너무 심했던 것이다. 비단 우리 영화에만 있던 현상은 아니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면 세상에 윤리나 인간미 따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니, 어쩌면 그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일지도 모른다. 다만, 영화에서조차 그처럼 지독한 현실을 보게 될 줄 몰랐을 뿐이다.

영화가 주는 위안, 우리는 그것을 판타지라고 부른다. 현실에서 이뤄지기 힘든 일들이 영화 속에선 척척 이뤄진다.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이 결실을 맺고, 진실을 입증하는 힘겨운 사투가 승리로 끝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영화 속에서 그 판타지를 구매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판타지의 밑바탕에는 현실적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다. 어른들의 판타지가 좀 더 사실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독한 현실을 직면하는 것, 리얼리즘적 태도엔 순수와 체력이 필요하다. 순수한 이념은 곧 리얼리즘의 체력이기도 하다.

이는 한편, 현실의 압력이 지나치게 높아 힘에 부칠 땐, 리얼리즘이란 거울이 무척 벅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실이 지옥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 때, 출구 없는 현실임을 절절히 체감할 때, 잔혹한 리얼리즘은 무겁고 힘겹다. 최근에 개봉한 한국 영화들이 해피엔딩의 판타지로 마무리되는 것을 우연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이다.

곽경택 감독의 <극비수사>, 임상수 감독의 <나의 절친 악당들>, 김성제 감독의 <소수의견>과 같은 영화들 말이다. 이 세 영화는 하나같이 현실에서 거의 보기 힘든 해피엔딩을 보여준다. 좁은 의미의 리얼리즘 시각에서 보자면 사실적이라기보다 작위에 가까울 정도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들이 그것이 판타지임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사라진 아이가 돌아오지 않지만 영화에서만큼은 살아 돌아온 아이를 보고 싶다. 젊은이들이 각자도생의 전장에 던져졌지만 뜻밖의 행운을 갖는 장면을 보고 싶다. 국가 기관이 잘못을 인정할 리 없지만 때론 스스로 사죄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일’을 영화에서만큼은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 <극비수사>의 한 장면


곽경택 감독에게 판타지는 과거라는 점에서 노스탤지어와 닮아 있다. 현실엔 없지만 그래도 과거엔 살아 돌아오는 아이도 있었던 것이다. 만일, 실화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가령, 유괴된 아이가 33일 만에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던가, 사주를 풀어 보는 도사가 사건 해결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가 영화화될 수나 있었을까? 이 불가능한 이야기는 이미 역사가 된 실화라는 이유로 가능한 서사가 된다. 실화이기 때문에 이 동화 같은 결말이 있을 법한 일이 되는 것이다.

임상수 감독은 아예 대놓고 판타지임을 강조한다. 3포세대가 된 20대 젊은이들이라고 해서 유쾌한 전복과 우연적 행운을 기대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오히려 임상수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판타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싶다. <소수의견>의 판타지도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된다. 돈키호테 같은 신참 변호사가 경찰, 검찰, 국가를 혼쭐낸다.

사실, 그런 변호인은 현실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정의로운 사내가 출현하리라는 기대마저 버려야 할까? 후배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선배나 원칙적인 법조인이 아예 없다고 부정해야만 할까? 아니다. 판타지에도 좋은 판타지가 있고, 나쁜 판타지가 있다. 즉 허구적 거짓말에도 도움이 되는 게 있고 그렇지 못한 게 있다. 정상이 코앞이라는 하산자의 거짓말이 등산의 고비를 견디게 하듯, 올바른 판타지는 이 고된 삶에 힘이 되어준다. 삶이 항해나 등산에 비유된다면 그것이 아름답고, 편해서가 아니다. 삶은 고통스럽고, 불평등하며, 부당하고, 잔혹하다. 어린 시절 도덕이나 윤리 교과서에서 본 대로 꾸려지는 세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세상을 바란다면 가능성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는 회의론은 우리를 어디로도 데려다줄 수 없다. 세상에 속지 않을 수는 있지만 속아본 바보가 산을 옮긴다.

세상과 결별한 미국의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트 월리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아마 우리 대부분은 이 시대가 어둡고 어리석은 시대라는 것에 동의할 겁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얼마나 어둡고 어리석은지를 그저 극화해서 보여주는 소설이 필요할까요? 어두운 시대에서 좋은 예술에 대한 정의는, 시대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고, 빛을 내는 인간적이고 마법적인 요소들에 대해 심폐소생술을 가해주는 그런 예술일 겁니다. 어떤 소설이든 하고 싶은 대로 어두운 세계관을 가질 수 있지만, 정말로 좋은 소설이란 이런 세계를 묘사하면서도 그 속에 살아 있는 인간 존재를 위한 가능성에 빛을 비춰주는 소설입니다.”

여기서 소설이라는 단어 대신 영화를 넣어 본다. 말하자면, 좋은 영화란 지독한 세계를 묘사하면서도 그 속에 살아 있는 인간 존재를 위한 가능성에 빛을 거두지 않는 영화이다. 좋은 판타지란 이런 것이다. 어두운 세상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 그 따뜻한 맹목 말이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