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자기 단속 사회의 역습

▲ “스크린 속 상상의 배경이던
통제와 치유 가능한 질병,
무능한 정부의 비밀주의 속
현실의 위협과 공포로”


누군가가 콜레라가 마을들을 황폐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우르비노 박사는 한시도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말했다.

“아주 특별한 종류의 콜레라임에 틀림없군. 시체들의 목덜미에 하나같이 확인 사살한 총구멍이 나 있으니 말이야.”(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중에서)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은 질병이 사회적 코드가 된 사태를 보여준다. 가령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은 성적 문란을 암시한다. 결핵이 파리한, 근대적 지식인의 병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결핵은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물랑루즈>의 샤틴이 걸렸던 병이다.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여성이 걸린, 낭만적인 질병 그게 바로 결핵인 것이다. 한편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암은 대개 ‘암’이라는 이름을 숨기고 있다. 뇌종양, 백혈병이 영화 속 암으로 사랑받는 이유이다. 그 아픔이 직접적으로 연상되는 대장암이나 피부암 등은 영화적 은유로 선택되지 않는다. 항암 치료의 고통은 구토와 비니(환자용 모자)로 암시될 뿐 진짜 통증은 스크린 너머로 지워진다. 영화 속의 ‘암’은 단지 사랑하는 연인들의 영원한 사랑을 훼방 놓는 장애물일 뿐이다.

질병이 은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이 질병에 익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낯선 것은 사회적 은유가 될 수 없다. 유통되는 은유란 자동화된 반응과 관습적 연상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콜레라’나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은 은유의 언어가 되지 못한다. 적어도 우리에게 이 전염병은 아주 오래전에 제어된 아니 극복된, 전근대적 전염병이기 때문이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우르비노 박사에게 콜레라는 관찰 대상이다. 그에게 콜레라는 단순히 강가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하층민에게서나 발생하는 질병이다.

그래서 그는 망원경 너머에서 그 공포를 바라볼 뿐이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1900년대 남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머싯 몸의 소설 <인생의 베일>의 주요한 소재도 바로 콜레라인데 1920년대 홍콩과 메이탄푸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두 작품은 모두 영화화되었는데, 여기서 콜레라는 전쟁 서사의 ‘전쟁’처럼 치명적 전제라기보다 주제의 매개로 등장한다. 사랑의 영원성과 뒤늦은 후회를 이어주는 은유적 배경으로 유행병(epidemic)이 등장하는 셈이다.

유행성 질병이 창궐하던 시대에도 사랑은 있고, 삶은 이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마르케스가 작품을 쓰던 시절과 콜레라 시대는 시간적 거리가 있었고, 서머싯 몸은 남부 프랑스에서 30여년 전의 중국 여행을 떠올리며 머나먼 메이탄푸의 콜레라를 그려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질병에 대한 은유와 서술은 시간적 혹은 공간적 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2013년에 개봉했던 한국 영화 <감기>나 2012년 <연가시>에 등장했던 전염병은 그런 의미에서 현실이라기보다는 있음직한 판타지에 가까웠다. 영화 속의 접촉성 전염병이나 수인성 전염병은 그래도 아직은 우리나라가 전염병에 대한 청정국가로 여겨졌을 때, 가능했던 상상이다. <월드 워 Z>에서 좀비 바이러스의 근원지로 평택이 선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관객들이 거리낌 없이 영화를 즐겼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13년만 하더라도, 전염병을 좀비와 같은 완전한 허구의 대상과 동일시할 수 있을 만큼, 우리에겐 거리감과 여유가 있었다. 즐겨도 좋을 위험,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고, 로봇이 인간을 공격하듯이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도 상상 속에선 즐거운 위험이었던 셈이다.

은유와 서술로서의 질병, 상상의 놀이로서의 질병. 여기에는 안전한 사회적, 위생적 보호망에 대한 기대가 녹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 기대가 완전히 배반된 현실에 놓여 있다. 배반의 현실 속에서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것은 영화 속에서 보았던 그 치욕스러운 개연성들이다. 자신의 입지를 먼저 생각하는 정치인, 부재하는 컨트롤타워, 무능한 행정부와 같은 영화 속 위기 상황들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체험 가운데서 안전한 상상의 놀이였던 영화적 풍경은 묵시록적 예언으로 전도된다. 상상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했던 위험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질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모한 비밀주의와 무능한 통제라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된다.

<전염병의 문화사>를 쓴 아노 카렌은 이미 꽤 오래전부터 새로운 전염병의 도래를 경고해왔다. 어느새 사람들은 미생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부주의만이 생명을 위협한다고 자만했다. 음주, 흡연, 안전벨트 미착용이 콜레라나 페스트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건강에 스스로의 무절제가 가장 위험하다며 자신을 단속해왔다. 웰빙과 웰다잉, 건강한 노후와 다이어트를 위해 체지방과 싸우고 유기농 식품을 찾는 동안 어쩌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질병의 진화를 외면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호환 마마보다 음란비디오가 더 무섭다고 교육받았던 지가 엊그제지만, 지금 우리는 메르스라는 질병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다. 병원 내 감염인지, 4차 감염이 끝인지, 이번주가 고비인지, 그 고비가 다음주로 이어질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공포는 일상이 되어간다.

정부는 다시 한번 자기 단속을 강조한다. 하지만 손씻기와 마스크 착용의 자기 단속은 최소한의 예방일 뿐이다. 불충분한 정보를 갖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우리에게 당분간 상상으로서의 위험은 없을 듯하다. 어서 시간적, 공간적 거리 너머 은유로서의 질병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