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공포영화의 죽음엔 ‘의미’가 있어야 한다

억압된 것은 귀환한다. 정신분석학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 명제는 공포 영화에도 적용된다. 공포 영화의 주인공들은 현실의 소수자들이다. 현실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었던 사람들, 혹은 기록되지 못한 채 사라진 자들이 공포 영화에서는 주인공으로 전경화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들일까? 현실의 주인공들은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들 즉 세속적인 기준에 잘 맞는 인물들일 것이다. 권력이나 돈을 잔뜩 가진 사람들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관습적 기준에 잘 들어맞는 사람들 말이다. 거꾸로 말해, 공포 영화의 주인공들은 가해자들이라기보다는 피해자들이고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각국의 공포담이나 괴담을 살펴보면 그 사회에서 전통적인 약자가 누구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전통적으로 공포 영화의 주인공 중에는 여성이 많다. 우리 영화도 그렇다. 어떤 점에서 한국의 공포 영화는 여성 잔혹사와 궤를 같이한다. 가부장제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 며느리는 빼놓을 수 없는 괴담의 주인공이다. 계모에게서 핍박받는 아동들도 자주 초대된다. 학대받는 아동들의 자리도 여럿 있다. 신체적으로, 계급적으로 약한 입장에 놓인 여자들은 그렇게 무서운 주체가 되어 돌아왔다.

최근 한국 영화계에서 사라진 장르 중 하나가 바로 공포 영화이다.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던 한국 공포 영화는 1998년 박기형 감독의 <여고괴담>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여고괴담>은 피해자 서사라는 공포 영화의 전형적 서사에 학교라는 보편적 공간을 접목해서, 낯익은 세계를 낯설게 하는 데 성공했다. <여고괴담> 성공의 가장 큰 저력은 바로 이 낯익음과 낯섦의 충돌이다. 프로이트가 언캐니라고 불렀던 이 정서는 공포 영화가 잊지 말아야 할 필연적 요소이기도 하다. 진짜 공포는 낯선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낯익은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 낯익은 공포는 학교라는 공간이 사전에 등재된 의미와 달리 무척이나 공포스럽고 폭력적인 곳이라는 데서 시작했다. 그것은 군사독재 시절 교련이라는 과목을 배우던 학생들부터 만성적 입시 신경증에 노출되어 있는 당시의 학생들에게까지도 해당되는 공포였다. 학교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것은 어떤 점에서 ‘진주’라는 소녀가 아니라 차별, 폭력이라는 점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다.

신인 감독과 신인 배우들의 등용문으로 각광받던 공포 영화는 거의 매년 초여름 관객들을 찾아오곤 했다. <여고괴담>의 성공은 5편에 이르는 프랜차이즈로 지속되었고, <고사>와 같은 의외의 흥행작이나 <기담> 같은 독특함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초여름 영화관이 서서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의해 잠식되면서 한국 공포 영화들의 설 공간이 줄어들었고 관객들의 호응도 식어갔다. 그리고 여기에 패러다임의 정체(停滯)가 보태졌다. <여고괴담> 식의 귀환이 더 이상 우리 관객들에겐 이물감도 공감도 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영화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의 한 장면.



2015년 극장가에 제법 독특한 공포 영화 두 편이 선보였다.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과 <손님>이 그 두 편이다. 두 작품 모두 척박한 공포 영화 시장에서 새로운 출구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우선 그 의의를 인정하고 싶다. 두 영화는 줄거리만 놓고 보자면 무척 다르지만 특징적인 면을 보자면 무척 닮아 있다. 두 작품 모두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어떤 곳을 배경으로 한다. 경성학교는 아예 기록에 없는 교육기관이고, 손님의 주된 배경인 시골 마을은 지도에도 표기되지 않는 장소로 묘사된다. 피해자가 최후의 가해자가 된다는 점도 닮아 있다. 복수 서사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 작품 모두 혼종장르이다.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은 미스터리와 다양한 하위 공포 장르물이 뒤섞여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손님>의 장르 혼용은 더욱 폭넓은데 미스터리에서 시작해 판타지를 거쳐 호러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독특한 시도들은 어딘가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은 <여고괴담>과 <기담>이 결합된 분위기이며 <손님>은 <이끼>와 <웰컴 투 동막골>이 기이하게 변주된 양식과 닮아 있다. 물론 공포 영화는 장르물이기 때문에 기시감을 배제할 수는 없다. 워낙 장르라는 것 자체가 서사적 문법이나 관습적 장치들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장르물은 약간의 변화로 찾아온다. 가령 <장화, 홍련>에서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꾸며진 집안이 폭력의 공간으로 전도될 때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소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흡수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생각보다 전폭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공포 영화에는 죽음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억압된 것들의 귀환도 그렇다. 현실 속에서 무의미한 숫자로 표기되던 죽음들이 영화 속에서는 이름과 사연을 입고 등장한다. 폐기된 사체가 서사를 가진 주체로 되돌아오는 것, 그것이 바로 공포 영화 속의 죽음이다. 그러므로, 공포 영화에서 죽음은 더욱더 값어치 있게 다뤄져야 한다. 죽음이 무의미해지는 순간 삶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현재적인 공포는 바로 현재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억압하고 있지만 그 사실조차 무의식과 관습에 묻혀 있는 것, 미처 언어나 상징으로 표기되지 못한 것, 그런 것 말이다. 일상의 보호색을 띤 공포, 너무 낯익어서 대면하는 순간 낯설어지는 그런 것들 말이다. 우리가 공포 영화의 진화라고 불렀던 기념비적인 작품들은 바로 이 억압된 것의 발견이며 그래서 몰랐던 죽음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공포 영화는 단순히 누가, 왜 죽었느냐를 묻는 논리적 수사극이 아니다. 인과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의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 바로 공포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공포 영화에서 가장 두려운 결과 역시 죽음이다. 적어도 공포 영화 속에서 그 죽음은 의미 있는 사건이어야만 한다. 복수로, 죽음으로 가득 찬 최근의 공포 영화들이 진짜 두려움을 주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왜, 누가 보다 그 죽음의 의미를 밝히는 것, 죽음을 소비하지만 그 안에서 삶이 버린 의미를 찾아주는 것, 그게 바로 진짜 공포이기 때문이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