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혐오와 정의, 만족의 두 얼굴

최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용어 중 하나가 혐오이다. 한국어에는 어색하지만 혐오의 최상급 표현이 등장했는데, 이미 우리가 너무나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극혐이다. 극혐은 2014년 신어로 선정되었는데, 아주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인 ‘극혐오하다’로 기재되었다. 여기엔 어떤 중요한 암시가 있다. 극혐은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싫어하는 마음이 언어와 행동으로 실현되는 것, 그게 바로 우리 사회 극혐의 얼굴이다. 싫어하는 데 그친다면 극혐은 일종의 개인적 취향에 멈출 수도 있다. 개미를 싫어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고,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미워할 수도 있다.

문제적인 것은 혐오가 이미 우리 사회에서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근래 가장 이목을 끌었던 여성혐오 발언 문제들만 해도 그렇다. 발언의 주체가 되었던 유명인들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지만 이면의 수많은 목소리들은 자못 대조적이었다. 심지어 불특정 다수에 속한 목소리들은 여성들에게는 혐오되어 마땅한 부분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런 목소리가 소수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혐오 발언은 일정 정도 용감하게 자기주장을 표현한다는, 기묘한 정의감으로 변주되고 있다.

혐오라는 표현이 전면에 등장하는 영화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나카즈마 데츠야 감독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일 것이다. 여교사로 시작된 마츠코의 삶은 윤락녀, 행려병자로 이어져 고독사로 마무리 지어진다. 삶의 세목이나 죽음의 양상으로만 보자면야 마츠코의 삶에서 혐오스럽지 않은 부분을 찾기는 힘들다. 그런데, 정작 마츠코의 삶을 수식하는 ‘혐오’는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무척이나 반어적이며 풍부하다. 그녀는 비록 세상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었지만 무척이나 뜨겁게 세상을 사랑한 여자이다. 열렬히 사랑할수록 증오만 되돌려준 세상, 그래서 마츠코의 일생을 수식하는 혐오는 역설이자 반어가 된다. 겉보기에 그녀의 삶은 혐오스럽지만 역설적으로 무척이나 사랑으로 충만하다. 그런 점에서 이 혐오는 사랑의 역설로 보아도 무방하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한 장면.




우리가 생각하는 혐오의 의미와 좀 더 가까운 작품은 뱅상 카셀이 출연하는 마티유 카소비치의 영화 <증오>일 것이다. 혐오의 실체는 주인공들에서 드러난다. 유태계 빈츠, 아랍계 사이드 그리고 흑인 위베르. 유태계, 아랍계, 흑인. 이 세 기표는 프랑스, 유럽의 오래된 혐오 대상이다. 그렇다면 혐오의 주체는 누구일까? 그들은 바로 유럽, 프랑스의 주류들, 즉 인종적으로 계급적으로 소수가 아닌 백인, 중간계급의 유럽인일 것이다.

문제적인 점은 사회에서 혐오의 주체와 대상으로 나뉜 사람들이 영화 속에서는 종종 놀라운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차별과 혐오가 심할수록 영화 속 결합은 더욱 감동적이며 드라마틱하다. 우리나라에서도 흥행에 성공한 <언터처블: 1%의 우정>은 흑인 하층민과 상위 1% 상류 계층이 나누는 우정을 그리고 있다.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보증서도 빠지지 않는다. <웰컴, 삼바>에선 불법 체류자와 프랑스 국적의 백인 여성이 사랑을 나눈다. 영화의 소재가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실에서는 거의 없는 환상이니까, 오히려 현실의 세계에서는 우정이나 사랑보다는 혐오와 차별이라는 언어가 더 어울리니까 말이다.

혐오는 비단 프랑스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영국에선 훨씬 더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인종이나 종교와 같은 눈에 띄는 요소가 아니라 경제적 계급에 의해 혐오가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공공의 적이 된 영국의 혐오대상은 바로 차브(chav)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이다. 지저분한 공공주택단지에서 태어나 직업을 갖지 않고, 약물에 중독된 채 10대에 무책임한 엄마가 되는 무절제하고 방탕한 하층민들, 평생 식료품점 계산원이나 비정규, 계약직으로 살아야 하는 최하위 노동계층, 그들이 바로 차브다.

그런데, 차브 역시도 영국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얼핏 주인공처럼 보인다.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에그시는 차브임에도 불구하고 최상류층 엘리트 계급 사회에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 심지어 북유럽의 공주와 하룻밤까지 획득하지 않던가? <미 비포 유>의 주인공 역시 차브 여성인데 소설에서만큼은 상위 1% 남성과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데 성공한다. 실제 TV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선 제이드 구디가 대책 없는 돼지라 비난받지만 허구에서만큼은 신화의 주인공이 되는 데 손색없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비난의 대상,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일정한 계층이나 그룹이 마치 충분히 그럴 만한 대상으로 합의되곤 한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차브는 스스로 기회를 저버린 한심한 낙오자들이고 프랑스에서 아프리카계 불법 체류자는 자국민을 위협하는 경제적 암흑물질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 사회의 혐오문제를 돌아보자. 과연 우리는 어떤 식의 논리로 혐오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일까?

명품 백을 주는 남자라면 무조건 호의를 베푸는 여자, 결혼 자금으로는 고작 몇 천 만원을 모아 놓고는 강남 아파트를 요구하는 여자, 운전도 못하면서 백화점에 자가용을 가지고 나오는 여자, 자기 외모는 생각지도 않고 키 180㎝ 이상을 원하는 여자, 자기 연봉은 고작 2000만원 근처이면서 남자친구는 5000만원 이상이기를 바라는 여자. 그런 여자들, 과연 그녀들을 비난하는 정당화의 논리는 무엇일까?

혐오는 약자를 향한 폭력이다. 잘못된 과녁을 향한 원한인 셈이다. 원한은 대상을 찾는다. 하지만 혐오는 정의의 수단이 아니다. 애정이 추상적인 것이라면 사랑은 구체적이다. 애정하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 마찬가지이다. 증오는 정확한 고유명사를 가진, 구체적 잘못을 지닌 자를 향한 실제적 미움이다. 그러니 비겁하게 혐오하지 말고 증오해야 한다. 슬픔도 힘이 되듯이 증오는 부당한 현실을 공략할 힘이 될 수 있다. 사랑의 반의어로서, 증오야말로 동사가 되어야 한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