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사도’ 자결과 처벌의 아이러니


비극은 가족 사이에서 일어난다. 훌륭한 서사로서 비극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서 <시학>은 비극이 반드시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비극적 사건이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면, 예컨대 살인이나 기타 이와 유사한 행위를 형제가 형제에 대하여 혹은 아들이 아버지에 대하여 혹은 어머니가 아들에 대하여 혹은 아들이 어머니에 대하여 행하거나 기도한다면 이와 같은 상황이야말로 시인이 추구해야 할 상황이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일까? 비극이 가족 사이에서 일어나야 한다니, 그것도 살인과 같은 행위가 가족 가운데서 일어나도록 시인이 추구해야 한다니 말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여기서 시인은 말하자면 이야기를 만드는 모든 창작자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를 꾸며 관객, 독자, 수용자들에게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최대한 이입 가능한 것을 상상해내야만 한다. 모든 사람들이 대개 가지고 있는 것, 그러니까 사람이라면 거의 대부분 가지고 있는 것, 가족이 선택된 이유이다. 모두가 경험할 수 있는 고통과 연민의 영도(零度)가 바로 가족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신문 사회면이나 인터넷 가십에서 가족 간의 상해나 살해 사건을 보며 아연실색하지만 그만큼 오래된 일도 없다. 인류가 자신의 삶을 기록하면서부터 사실, 근친 간의 살해 및 상해 행위는 지속되어왔던 것 아닌가? 부정한 남편을 벌주기 위해 그와의 사이에서 난 친자식을 죽이는 메데이아나 형제를 죽인 카인, 알고 그랬든 모르고 행했든 결과적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 오이디푸스까지, 인류 역사와 이야기에 있어서 가족 간의 비극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아주 먼 곳에서 일어난 비참한 이야기는 쉽게 이입되지 않는다. 사람이란 생각보다 이기적이고 기대보다 상상력이 얕아서 먼 곳의 비참함은 남의 것이라 넘기기 일쑤다. 허구에 힘이 있다면 이 먼 것을 마치 내 것처럼 가깝게 끌어오는 것일 테다. 벌써 240여년 전에 일어난 한 가문의 비극을 지금 스크린 위에 재현함으로써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힘의 결과물이다. 다시 한 번 영상으로 재현된 <사도> 이야기이다.



영화 <사도>의 한 장면_경향DB




<사도>는 조선왕조의 오래된 비극, 스캔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이야기는 왕과 세자 이전에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이다. 일찍이 루카치는 모든 예술가들은 각자의 라이오스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라이오스는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이다. 루카치의 말은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아들은 아버지를 죽여야 어른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아버지는 일종의 상징이다. 전범이 된 표현, 상식이 된 발상, 표본이 된 질서를 그저 따르기만 하는 순응적인 아들은 결코 새로운 표본이 될 수는 없다. 무릇,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기존하는 엄격한 아버지의 세계와 결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속의 사도는 엄격한 아버지의 말을 따르다 못해 이내 자신을 놓치고 미쳐버린 광인으로 그려진다. 사도와 그의 아버지 영조를 다루는 수많은 드라마들은 가족 간에 발생한 비상식적이며 폭력적인 사건을 주목해왔다.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두고 이레 동안 천천히 죽이다, 라는 사건은 이성을 잃고 급격한 분노로 즉 실수로 가족을 살해한 것과는 다르다. 말하자면, 아버지 영조는 충분히 생각을 하며 아들에게 죽음을 준 것이다.

이 죽음의 사건은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상식이나 개연성을 바탕으로도 쉽게 재구성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다고 몰입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 <사도>는 이 이해할 수 없는 빈 구멍을 강렬한 눈빛을 내뿜는 배우들의 에너지로 증폭시켰다. 모르기 때문에 더 몰입되고, 이해할 수 없기에 그 광적인 분위기가 더욱 매혹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은 조선왕조 사상 가장 훌륭한 왕으로 기록되고, 반추되고, 재해석되는 정조라는 아들이다. 이산, 말하자면 그는 두 명의 아버지를 동시에 섬긴 아들이다. 문자로 남겨진 역사에서 아버지는 사도가 아닌 영조이다. 영정조시대라는 역사적 호명 가운데서 사도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즉, 대문자 역사와 정치사의 맥락에서 정조의 아버지는 영조이다. 그러나 분명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사도이다. 정조의 가장 큰 아이러니가 있다면 그것은 이 두 명의 아버지를 모셨어야 했던 것이다. 대문자의 아버지 그리고 친근자로서 뼈와 살을 직접 준 아버지 말이다.





영화 <사도> 속에서 아버지 영조는 마치 영재 교육에 몰두하는 현대식 아버지처럼 묘사된다. 내가 어린 시절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 공부를 하지 않는다니 이해가 안 간다는 영조의 대사는 영조와 같은 아버지의 모델이 비단 과거완료형이 아님을 보여준다. <사도>의 아버지는 <사랑이 이긴다>의 어머니로 변주된다. 어머니와 딸로 변주된 이 관계 속에서 어머니는 칭찬도, 격려도 없이 몰아붙인다. 그것이 다 딸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결국 어머니의 ‘말씀’에 끌려다닌 딸아이의 미래는 죽음을 향해 열려 있을 뿐이다.

결국, 비극은 가까운 사이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 길을 가다가 넘어져 죽는 일이 우연이라면 가족 가운데서 발생한 참극은 필연이다. 어머니가 딸을, 아버지가 아들을 우연히 죽게 하는 경우는 없다. 그것은 죽음으로밖에 드러날 수 없는 왜곡된 관계의 결과물이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작가 오정희의 말처럼 “가족이란 생각하듯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별것 아닌 것도 아니다.

문제는 콤플렉스의 주체가 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이다. 아버지를 살해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죄를 스스로 밝히고 죄의 주인이 되어 자신을 벌한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두 눈을 멀게 하고 추방자의 숲 콜로노스를 향해 간다. 그렇게 그는 죽지만 살아난다. 하지만 사도는 아버지에게 자결을 명받지만 그마저도 실패하고 끝끝내 아버지로부터 죽음을 받는다. 태어남도 그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죽음에도 그의 선택은 없다. 오로지 아버지뿐이었던 인생, <사도>를 통해 다시 가족과 비극을 읽는다.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