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노장의 품격, 거장의 인문학

2015년에 본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면 <매드 맥스>, <마션> 그리고 <인턴>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세 작품 감독은 모두 노장이다. 평균 연령을 내 보자면 70세, <매드 맥스>를 연출한 조지 밀러 감독은 만 70세(1945년생)이고 <인턴>을 연출한 낸시 마이어스는 만 66세(1949년생)이다. <마션>을 연출한 리들리 스콧은 무려 만 77세이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단순히 이들의 연령이 70세 정도 된다는 게 아니다. 70세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각이 여전히 유연하다는 점에서 놀라웠고 한편 젊은이라면 도저히 갖출 수 없는 삶의 혜안을 가졌다는 점에서 존경스러웠다. 이 세 영화, 세 명의 연출자는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노장의 품격과 거장의 지혜를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는 존경할 노장이나 지혜로운 거장이 드물기 때문이다.


1977 년 <결투자들>로 데뷔한 리들리 스콧은 끊임없이 영화를 연출하고 기획, 제작해왔다. <에일리언>은 S.F 호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참조사항이며 <델마와 루이스>는 페미니즘과 로드 무비를 말할 때 역시 반드시 언급해야만 하는 작품이다. <글래디에이터>나 <블레이드 러너>는 또 어떤가? 말하자면, 리들리 스콧은 영화 인생 전반이 모두 다 전성기이다. 그는 신인 시절부터 중견에 이르러 노년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거장이거나 노장이기 이전에 늘 현역이었던 셈이다.

이는 조지 밀러나 낸시 마이어스 감독도 다르지 않다. 조지 밀러의 영화 세계는 <매드 맥스>의 독특한 이종결합적 상상력부터 <로렌조 오일>이나 <해피 피트>에 이르기까지 무척 다양하고 폭넓다. 컴퓨터 그래픽이나 3D를 혐오한다는 낸시 마이어스는 드라마 장르의 귀재이다. 게다가 그는 여성이다. 여성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한국의 영화 환경에서 보자면 환갑은 물론 은퇴 연령도 지난 할머니 낸시 마이어스가 앤 헤서웨이 같은 대형 배우를 기용해, 상업 영화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기적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바로 할리우드가 지독한 자본주의 가운데서도 버텨내는 체력의 근간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평균 연령 70세가 연출을 맡았다는 물리적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 낸 영화의 깊이와 힘이다.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는 여태껏 보아 왔던 그 어떤 영화들보다 급진적이며 진보적이다. 기성 세대라고 부르기 미안할 만큼 <매드 맥스>에 구현된 조지 밀러의 시선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 <매드 맥스>의 주인공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의 캐릭터만 해도 그렇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향해 나가는 여전사 퓨리오사에 집중된 힘은 곧 조지 밀러가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과 기대의 반영이기도 하다.


‘매드 맥스’ 조지 밀러 감독 _‘마션’ 리들리 스콧 감독 _ 인턴’ 낸시 마이어스 감독




<인턴>의 주인공, 실버 인턴 벤(로버트 드 니로)의 모습이 눈길을 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40여년간의 직장 생활을 마치고 은퇴자로 살아가고 있던 벤은 갓 서른이 넘은 여사장의 인턴으로 일하게 된다. 나이 든 세대의 경험과 젊은 여사장의 성공이라는 뻔한 구도 속에서 낸시 마이어스는 주의 깊게 새겨 볼 만한 노년의 유형을 제안한다. 그것은 바로 귀는 열고 입은 닫은 노인이다. 비록 경험이 풍부하고, 지혜가 많지만 70살 벤은 함부로 충고하거나 제안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자신에게 도움을 내미는 순간은 놓치지 않고 적절한 조언을 해 준다. 신사라면 언제나 주머니 속에 손수건을 지니듯이 벤에게 충고란 간섭이 아니라 배려이다.

<인턴>에 그려진 70세 노인의 모습은 거리의 젊은이들에게 고함을 치는 <국제시장>이나 <장수상회>의 노인과는 다르다. 벤은 젊은이들의 줄넘기에 뛰어들기 위해 자신의 숨을 고르고 박자를 조율한다. 나이가 든 만큼 참을성도 있다는 것, 낸시 마이어스는 노년의 지혜란 고집이 아니라 적절한 배려라고 말해 준다.

노장의 솜씨가 거장의 인문학이 되는 순간은 <마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지구를 떠나 화성 탐사에 나선 마크 와트니, 그는 화성에 도착한 지 6일 만에 화성에 홀로 남겨진다. 함께했던 동료들은 이미 그가 죽었다고 판단했고 나사에 자신의 생존 사실을 보고하기도 까마득하다. 고장 난 수트를 입고 화성의 사막 한 가운데서 깨어난 마크, 그러나 그는 매우 탁월한 재능으로 하루 하루의 삶을 이어 간다. 그 탁월한 재능은 바로 긍정성, 삶에 대한 부드러운 수긍과 탄력적인 낙관이다.

정체 불명의 괴물보다 동승했던 동료들이 더 무서웠던 <에일리언>과는 달리 <마션>의 세계는 따뜻한 인간애와 유머로 가득하다. 주인공 마크는 절대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루이스를 비롯한 동료들 역시 마크를 포기하지 않는다. 마크는 매일 로버를 타고 사막으로 나가 지평선을 바라보고 돌아온다.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저, 할 수 있기 때문이다(Just because I can.).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의 노력으로 해 내는 것, 리들리 스콧이 말하는 낙천적 인생의 핵심이다.

< 매드 맥스>, <인턴>, <마션>의 저류에 흐르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 인간 자체에 대한 믿음이자 애정이다. 비록 혹독한 환경일지언정, 비록 나이를 먹고 지쳤을지언정, 비록 홀로 남겨졌을지언정 인간은 인간을 믿음으로써만 버티고 구원받을 수 있다. 존경은 나이의 대가가 아니다. 거장 역시 세월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 그가 바로 노장이자 거장이 아닐까? 노장이 품격을 갖출 때 거장은 그 자체로 존경받는 인문학일 수 있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