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세 우주와 영화적 정의

ㆍ마션·그래비티·인터스텔라 위축된 ‘상상의 근육’에 자극

인간은 이해하기에 앞서 심판하고자 한다. 밀란 쿤데라가 그의 책 <소설의 기술>에서 했던 말이다. 사람들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이름을 붙이지 않고서는 불안하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범죄가 발생했을 땐 치정으로 인한 살인, 불륜으로 인한 살인, 보험금을 위한 사기살인처럼 단숨에 원인을 추정해 기사로 작성한다.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나면 원인을 알 수 없거나 모호한 경우가 더 많지만 적어도 기사는 그렇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은 심판하고 지워버린다. 심판은 판단을 포기하겠다는 암묵적 승인이다. 생각의 한쪽에서 없애 버리는 것이다.

만일 영화에 그러니까 서사라고 부르는 이야기에 정의가 있다면 그것은 심판하지 않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는 인간의 본질적 모순을 심판하지 않고 바라본다. 때로 인간에게는 심판으로 규정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물론, 이 인정은 인간을 꽤나 무력하게 만든다. 하지만 좋은 예술은 이 무력함을 바라볼 줄 안다. 그래서, 좋은 예술의 세계에는 추상적인 프로파간다나 교조적 문구가 아니라 풀어헤친 구체적 삶이 들어 차 있다. 구체적인 것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도덕이다.

사람들은 풀어야 할 의문의 대상인 세계를 점점 기술적이며 수학적으로 분석 가능한 대상으로 바꾸어 왔다. 그것을 가리켜 과학의 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 세상의 복잡함을 축소하고 난해함을 정복해왔다. 아니 그렇다고 믿었다. 이 과정에서 상상력은 구체적 검증 능력을 갖춘 과학에 밀렸다. 이렇듯 지식과 정보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상상력의 영역이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자연은 소유의 대상이 되고 인간은 자연을 초월하는 능력자로 전도되며 숭고한 상상력은 도태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상상력은 언제나 늘 구멍을 만드는 데 탁월해서 과학과 기술의 영역 안에 그 구멍을 만들기 시작했다. 구체적 생활 세계에서의 상상적 지평이 불가능해지자 기술의 힘을 빌려 경계를 무너뜨리고 넓게 퍼져 나간 것이다. S.F 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최근 화성에서의 생존기를 그린 <마션>이 화제가 되면서 근래에 개봉했던 비슷한 영화들이 함께 주목받고 있다. <그래비티>와 <인터스텔라>가 바로 그것이다. <마션>을 합쳐 우주 3부작이라는 별칭을 붙일 수 있는 이 작품들을 두고 관객들은 어느 것이 더 좋으냐며 취향을 고백하기도 하고 취향을 넘어 작품의 우열이나 과학적 합리성 여부를 꼼꼼히 따져 비교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따져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과연 이 세 영화는 모험영화일까, 재난영화일까? 재난이라고 정의한다면 이는 고립과 낙오를 중점에 둔 독법의 결과이다. 반대로 모험이라고 칭한다면 마침내 생존과 귀환에 성공했음을 강조한 것이다. 내 기준에서 보자면 이 세 영화는 모험영화이다. <타이타닉>이나 <포세이돈 어드벤처>처럼 인간의 오만함을 풍자하기 위해 영화적으로 도입한 재난이 아니라 인간성 그 자체의 힘을 보기 위해 초대된 위험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개의 S.F는 과학적 합리성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을 구원한 것은 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은 위험의 직접 원인이다. 과학과 기술은 인물들을 위기의 절정까지 몰고 가지만 마침내 그들을 귀환시키는 것은 우리가 알고는 있으나 이제껏 쉽게 찾아내려 하지 않았던 인간적 힘이다. <그래비티>는 삶의 복원력이었고 <인터스텔라>에선 사랑이었으며 <마션>에선 긍정력이었다. 앎에의 열정은 관객을 사로잡지만 결국 구원은 인간의 구체적 삶에 대한 이해에서 가능해진다.

만약 영화에 도덕이 있다면 그래서 영화적 정의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처럼 우리가 누리고 있는 기술을 잘 활용해 인간을 기술 너머 상상력의 영역까지 데려다 준다는 것이다. 이 상상력의 확장을 통해 우리는 이미 둔감해진 생활세계 너머로 갈 수 있다. 지식이 닫아 놓은 삶의 총체적 영역, 인간학에 대해 실감 나게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영화는 도덕적으로 심오하면서도 여러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도덕적이면서도 대중적일 수 있다. 그게 바로 영화적 도덕, 서사적 정의의 핵심이다.

현대 사회는 점차 인간의 모험 기능을 뺏는다.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친 위험을 모험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하기 어려운 재난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 있다. 재난이 결국 운명론으로 귀결되는 결과라면 모험은 인간의 염원이다. 이 염원을 통해 우리는 비속한 삶 속에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존재와 전체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그래비티>는 재난의 두려움이 아니라 고독과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인터스텔라>는 지구 종말의 막막함이 아니라 초월적 힘과 결합된 사랑의 힘을 돌이켜보게 한다. <마션>이 긍정도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진짜 정의로운 영화는 기술을 통해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영화는 공적인 이야기조차도 매우 사적인 체험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 세 우주 영화가 감동적인 것은 위축된 상상의 근육을 스트레칭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생각의 운동 기능을 자극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훌륭한 영화란 무릇 이처럼 허구적 정의를 추구하는 것일 테다. 존재하지만 감각하지 못하는 생각의 근육을 자극해 주는 것, 그것이 사회적 정의에 대한 것이든 인권에 대한 것이든 간에 결국 우리를 존재의 망각으로부터 깨워주는 자극 말이다. 정치가 심판이라면 영화는 사유이다. 그리고 그 사유 속에서 영화의 정의는 지속된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