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고향, 자아의 거울

ㆍ인격을 덮어주는 마음의 거처 낭만적 기억없이 갈 수 없는 곳
ㆍ‘서부전선’에 소환된 까까머리 전장에서 안락한 쉼터를 꿈꿔

김수용 감독의 1967년작 <안개>는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서울의 제법 큰 규모의 제약회사에 근무 중인 윤기준은 전무 승진을 앞두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사실, 제약회사의 사주는 아내의 아버지, 즉 장인이다. 말하자면 그는 고향 무진 출신 중 가장 출세한 사람 중 한 명이다. 무진에서 세무사로 일하는 친구 ‘조’ 역시 꽤나 출세한 인물 중 하나이다. 윤기준은 여교사로 일하는 하인숙을 아내감으로 추천한다. 그러자, 조가 대답한다. “야, 이 약아빠진 놈아, 넌 빽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물어 놓고 기껏 내가 어디서 굴러온 줄도 모르는 말라빠진 음악선생이나 차지하고 있으면 맘이 시원하겠다는 거냐?”

작가 김승옥, 감독 김수용에게 1960년대의 고향은 이랬다. “사실, 나는, 몇 시간 전에 조가 얘기했듯이 빽이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만나는 것을 반드시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리우면서도 진저리나는 곳, 그런 곳이 바로 고향으로 그려진다. 속물이 되어야 출세할 수 있었던 시절, 비겁한 속물들이 찾아가는 치유의 공간, 그게 바로 고향이었던 셈이다.

추석이다. 연례행사처럼 고향으로 가는 차편을 마련한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고향이란 언제나 즐거운 곳만은 아니다. TV 뉴스와 공익광고에서야 고향 가는 즐거운 길이라며 서울역의 플랫폼에서 웃는 얼굴을 클로즈업하지만 마음속까지 웃고 있으리라 보장할 수는 없다. 그래서인지 영화와 소설에서 고향이 꼭 안락한 휴식처로만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안개>에 그려졌듯이 고향은 부끄러운 과거와 숨기고 싶은 내면, 억누르고 사는 욕망이 도처에 흩뿌려져 있는 곳이다. 고향은 그렇기 때문에 가고 싶지만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올리버 색스의 책 <화성의 인류학자>에는 유년 시절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화가 프랑코 마냐니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는 머릿속에 환영처럼 떠오르는 폰타나의 이미지를 계속 그림으로 그려낸다. 그의 그림 속에서 고향 폰타나는 세상이 다 망해도 여전히 보존될 낙원으로 표현된다. 폰타나는 세월의 흐름과 무관한 스노볼 속 조형물처럼 언제나 그대로이다. 이를테면, 머릿속의 고향, 기억 속의 고향은 현실이라기보다는 관념적 이상향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프랑코 마냐니는 고향에 갈 기회가 생겨도 한사코 거절한다. 비행기만 타면 갈 수 있지만, 그는 머릿속 아름다운 고향을 잃어버릴까봐 고향으로 가는 것을 꺼린다.

이런 마음은 아마 황석영의 소설 <삼포 가는 길>의 정씨가 기차를 타지 못하는 이유와 상통하는 것일 터이다. 출소한 정씨는 새로운 삶을 일구기 위해 고향 삼포를 향해 간다. 그런데, 기차역에 도착해 그는 삼포가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탈바꿈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어느새 삼포는 바다에 방둑을 쌓아 고기잡이는커녕 복잡하기가 이를 데 없는 육지가 되어 있다. 기차만 타면 삼포에 닿을 수 있지만 정씨는 발이 묶인 듯 플랫폼에 서서 눈발을 헤치며 들어오는 기차를 바라볼 뿐이다. 고향은 있지만 고향이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뜻하는 ‘향수’는 영어로 ‘nostalgia(노스탤지어)’라고 한다. 노스탤지어는 그리스어로 귀환을 뜻하는 노스토스(nostos)와 고통을 의미하는 알고스(algos)가 합쳐진 단어이다. 즉 고향을 그리워하는 데는 돌아가는 고통이 요구된다. 밀란 쿤데라는 <향수>에서 이 귀환의 고통을 주목한 바 있다. 망명자로서 평생 외국을 떠도는 밀란 쿤데라에게 고향, 귀환, 향수란 단순한 명사일 수가 없을 터이다. 이는 비단 밀란 쿤데라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우리는 향수를 단순히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갈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만 여기지만 고향에 대한 마음이 간단치만은 않다는 뜻이다. 너무 변하지 않아도 갑갑하지만 지나치게 변해도 안타깝다. 이는 ‘고향’과 함께 환기되는 여러 가지 이미지들에도 해당될 것이다. 어머니, 가족 그리고 자기 자신과 같은 것 말이다.



영화 <서부전선>의 한 장면._경향DB



추석연휴가 되면 으레 명절용 영화가 개봉한다. 여러 편의 영화들 중엔 꼭 귀향의 애틋함이나 가족의 품에 대한 그리움을 다루는 작품이 있기 마련이다. 올해엔 아마 <서부전선>이 그 몫을 담당하지 않을까 싶다. 두메산골에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고 살아온 남복과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던 열여섯 살 까까머리 학생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선에 소환되었다. 그들은 오매불망 집,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꿈꾼다. 가족과 연인이 있는 곳, <서부전선>에서 ‘고향’은 전쟁터와 대비되는 안락한 쉼터로 그려진다.

역사학자 전우용은 어떤 점에서 한국전쟁의 혼란이 적서차별의 오래된 인습을 단번에 해결해주었다고 말한다. 노비 문서와 족보가 불타 없어지자 너나없이 다 양반이 되고 다 귀한 가문의 자손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향이란 내가 도시에서 숨기고 살아가는 본연의 자아, 한편으로는 도시에서는 드러낼 수 없었던 유치한 내면까지 모두 드러낼 수 있는 그런 공간 아닐까?

태어난 나라의 말을 모국어라고 부른다. 아버지의 말이 아니라 어머니의 말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결국 회귀할 근본의 것들은 대개 어머니와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겁해질 수 있는 곳, 엄마에게만큼은 여지없이 속을 들키고 마는 자식들처럼 고향이란 그렇게 마음속 깊은 앙탈까지 모두 꺼내 놓을 수 있는 곳이 아닐까? 눈 가리고 아웅하듯 비겁하게 살아가는 도시인의 자아, 생활인의 인격을 덮어주는 마음의 거처 아닐까?

되돌아가고 싶은 곳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낭만주의자이다. 낭만적 기억이 없다면 고향은 결코 돌아갈 만한 곳이 못될 것이다. 어떤 곳에도 가고 싶지 않고, 아무 곳으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을 때, 어른이 되고 회의주의자로 늙어간다. 그래도 여전히 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것, 그건 삶의 세부를 장식하는 삶의 낙이기도 하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