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서사 충족의 늪, 환상의 비만

서사적 대리 만족의 우려는
좌절·실패를 전제하기 때문
현실에서 변화를 포기할 때
‘저항’을 대신해서 등장한다”


호랑이와 하이에나, 얼룩말, 오렌지 주스라고 불리는 오랑우탄과 한 소년이 태평양을 표류한다. 227일간 바다를 표류하던 중 소년만이 유일하게 생존한다. 살아남은 소년에게 사건 조사 위원들이 사고 경위에 대해 묻는다.

호랑이, 하이에나, 얼룩말, 오랑우탄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미심쩍다. 사건 조사 위원들은 좀 더 믿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그래서 소년은 프랑스 요리사와 대만인 선원, 엄마 그리고 자신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해준다. “자, 이제 마음에 드세요?” 이내, 조사관들은 입을 다물고 만다.

동물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와 사람이 등장하는 이야기, 줄거리는 같지만 그 이야기의 여파는 다르다. 하이에나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것은 본능이지만 프랑스인 요리사가 대만인 선원을 죽게 하는 것은 폭력이다. 동물이 등장하는 우화는 메타포가 되지만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잔혹서사가 되고 만다. 소년이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되는 건 마찬가지라고 해도 방식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진다. 같은 사건을 다르게 말하기, 이야기하기는 때로 완강한 현실을 마주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동화에 등장하는 계모는 모두가 다 친모라는 말이 있듯이 이야기는 현실에서 겪는 갈등과 긴장을 완화해준다. 친엄마를 미워하는 게 죄책감을 준다면 새엄마를 미워하는 것은 어쩐지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소녀가 부유하고 다정한 남자를 만나 신분상승을 거두는 일도 비슷한 맥락에 속한다. 때로는 현실의 피해자나 소수자가 이야기에서는 가해자나 권력자가 되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그들이 을이지만 이야기 가운데에서만큼은 갑으로 도치된다. 이를 일컬어 서사 충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이 개연성으로 가능해진다.

주목할 것은 최근 한국 영화에서 이 서사 충족이 매우 극단적인 방식으로 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쪽의 끝에 <베테랑>, <치외법권>과 같은 판타지가 있다면 다른 한쪽 끝에는 <오피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잔혹 공포극이 있다. <베테랑>과 <치외법권>에서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처벌할 수 없는 사회의 ‘거악’들이 평범한 인물의 영웅적 행동으로 처단된다. 서민의 고혈을 쥐어짜던 탐관오리들이 암행어사에게 처벌받는 <춘향전>의 결말처럼 <베테랑>과 <치외법권>에서 정의는 승리한다. 사필귀정, 인과응보와 같은 고전적 서사 판타지가 재연되는 것이다. 마침내 망신당하고, 처벌받는 ‘악’을 보면 무척이나 개운하고 시원하다.

문제는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만 현실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안하무인이었던 재벌 3세가 ‘오라’를 받는 장면을 목격했지만 이내 특별 대우를 받으며 그 오라를 벗는 장면까지 보고 말았다. 세상이 반보쯤 걸음을 옮겨 제자리에 가까워진 것 같았지만 마치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행성처럼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고 만 것이다. 부패와 부정의 강한 장력을 다시금 확인한 셈이다.

이쯤 되면, 인구의 5분의 1이 즐기고 있는 사필귀정의 개운함이 <홍길동전>이나 <춘향전>이 주었던 서사적 대리 만족과 다를 게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홍길동도, 장길산도, 임꺽정도 모두 현실에 존재했던 인물이지만 우리가 즐긴 것은 그들의 역사 자체가 아니라 신화성과 민중적 기대가 집약된 ‘이야기’였다. 현실의 좌절이 이야기에서 승리로 전복되고, 현실의 인력을 이야기의 척력이 끊어낸다. 쾌걸 조로나 일지매가 현실의 악을 처단하듯 어쩌면 우리는 서도철과 같은 돈키호테가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즐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판타지가 우려스러운 것은 사실 서사적 대리 만족이 좌절과 실패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싸움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때, 현실에서의 변화를 포기할 때, 허구적 대리 만족이 저항을 대신해 등장한다. 이러한 면은 공포 서사 가운데서 좀 더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대개 공포 영화의 주인공은 현실의 피해자, 을인 경우가 많다. 한국의 전통적 공포담에 ‘며느리’나 ‘딸’이 주로 공포의 주체로 등장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는 저항조차 할 수 없었던 약자들이 사실성을 넘어선 서사적 허구에서는 무서운 힘을 가진, 권력자로 등장하는 것이다.

영화 <오피스>의 한 장면.



약자는 사회적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오피스>는 우리 사회의 ‘을’이 누구인지를 잘 보여준다. <여고괴담>이 재잘거리는 수다와 가벼운 웃음소리가 가득해 보이는 여고가 얼마나 폭력적인 공간인지를 보여주었다면, <오피스>는 목걸이 명찰과 정장 슈트를 입은 채 근무하는 밝은 사무실이 얼마나 잔혹한 공간일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사무실은 말하자면 자발적으로 인권을 반납하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사회적 약자가 되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너무 성실한 사람, 일만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오피스>의 김병국 과장은 너무 일만 하고, 융통성 없이 성실하기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고, 도태된다. 5개월간 묵묵히 잡일을 해온 인턴의 무던함도 답답함으로 여겨진다. 성실하게 일하는 게 단점이 되고,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세계, 이는 아무리 성실하게 일을 하더라도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도 적용된다.

물론, 이야기 속에선 그들이 자신의 성실함을 비웃던 사람들을 벌벌 떨게 할 수도 있고, 벌을 줄 수도 있다. 마치 서도철이 조태오를 멋지게 검거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통해 벌을 주는 것은 사실 가장 간절한 마지막 기원이기도 하다.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불을 켜고 따뜻한 집 안을 바라보며 꿈을 꾸듯, 이야기가 주는 충족의 유효기간은 무척이나 짧다. <매트릭스>의 사이퍼는 괴로운 현실을 버리고 달콤한 환상을 선택한다. 물론 환상은 힘을 준다.

하지만 너무 많은 환상은 충족이 아니라 비만을 가져올 수도 있다. 판타지와 공포 사이, 이 긴 스펙트럼 안에서 진짜 현실은 익사 중일지도 모른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