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환상과 환각의 사이에서

유력한 대통령 후보와 재벌 회장 그리고 그들을 돕는 정치깡패 안상구가 있다. 뒷거래의 판을 짠 이는 대한민국 여론을 움직이는 유력 일간지 논설주간 이강희다. 더 큰 성공을 원한 안상구는 이들의 비자금 파일로 거래를 준비하다 발각되고, 이 일로 폐인이 되어 버려진다. 그리고 빽도 없고 족보도 없어 변변치 않은 일만 하는 검사가 등장한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부류가 의기투합한다.’ 검사와 정치깡패가 손을 잡고 더러운 권력의 카르텔을 손보기 위해서다. 개봉을 앞둔 우민호 감독의 영화 <내부자들> 줄거리다.

“복수극으로 가자고, 화끈하게.” 영화 <내부자들>의 의도는 이 광고 문구에 압축되어 있다. 영화는 화끈한 복수극을 꿈꾼다. 이는 곧 관객에게 화끈한 복수의 쾌감을 주겠다는 호언장담이기도 하다. 좀 다르게 생각해보자. 만일, 같은 줄거리를 뉴스에서 보았다면 어땠을까? 유력한 대통령 후보와 재벌 회장의 커넥션이 밝혀진다. 불법 정치자금의 자료가 확보되고, 심지어 변태적인 성접대 동영상까지 발견되었다고 한다면 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미 현실에서 이것과 유사한 기사를 몇 번 목격한 바 있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의 치명적 결함을 발견했던 적도 있고, 심각한 성접대가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설정이 아니라는 것도 목격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땠나? 대개, 어설픈 사람들만 처벌받고 정작 기사의 머리를 장식하던 인물들은 죄다 빠져나가곤 했다. 말하자면, 현실에서 다치는 쪽은 정치깡패 안상구 하나이다. 현실 속의 대통령 후보, 재벌 회장, 언론인은 결코 다치지 않는다. 현실은 어둡지만 영화는 화끈하다. 현실에서의 복수가 어렵지만 영화에서는 여러 번 반복된다. 깃털이 몸통을 흔든다.

올해만 해도 벌써 네 번째 작품이다. 평범한 ‘을’ 혹은 억울한 ‘을’이 구조적 모순의 피라미드 끝에 있는 ‘갑’에게 복수하는 영화 말이다. <베테랑>은 천만 관객을 동원했고, <치외법권> <성난 변호사>의 주제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내부자들>의 맥락도 동일하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영화에서만큼은 화끈한 복수를 계획한다. 그것이 영화의 매력 아니냐고 더 큰 소리로 복수를 외친다.

실러라면 이를 가리켜, 그러니 “삶은 진지하고, 예술은 명랑하다(Ernst ist das Leben, heiter ist die Kunst)”라고 말할 만하다. 실러는 예술을 현실과 대비해 미적 가상이라고 불렀다. 현실의 지독한 힘 앞에서 정의는 순진하게 부서지고 복수는 허망하게 실패한다. 구조적 모순이 된 부패권력 앞에서 복수를 다짐하는 것 자체가 낭만적인 선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화라는 미적 가상을 통해 낭만적 복수를 꿈꾸는 한 남자를 만나고, 응원하게 된다. 그가 느끼는 좌절감에 깊이 공감하고 마침내 그가 복수에 성공할 때 쾌감의 절정을 함께 누리게 된다. 불가능한 현실이기에 오히려 미적 가상으로서의 영화에 더 깊이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화 <내부자들>의 한 장면.



물론, 공감에는 치유의 효과가 있다. 우리는 현실에서는 슬프거나 두려운 일을 경험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안전한 허구에서만큼은 즐길 수 있다. 어차피, 영화적 서사에서 접하는 일들이 진짜 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실적이라고 해도 영화 속의 일들이 현실은 아니다. 사실에서 비롯한 실화 소재라고 해도 우리가 경험한 현실과는 또 다른 차원의 허구 위에 직조되어 있다.

인간이 가진 위대한 능력이자 소루한 한계는 공감의 능력이 실패나 고통에 더욱 민감하게 발휘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행복보다는 타인의 불행에 더 깊이 이입한다. 한편, 성취의 기쁨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지 않는 데 비해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한 일에 대한 희망은 더 오래 간직하며 실패의 고통 또한 오래도록 기억한다. 고통은 전염력이 강하다. 무의식 깊숙한 곳에 남겨진 상처를 트라우마라고 부르지만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에는 마땅한 호명이 없다. 이렇게 우리는 고통과 실패를 오래 기억한다.

이 기억의 방식 중 하나가 판타지를 통한 허구적 극복과 복수이다. 하지만 이 허구적 극복은 왜곡된 기억과 구별하기 힘들다. 때로 미적 가상이 제공한 허구는 삶의 허방을 건널 힘을 주고 상처에 위안을 주기도 한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적을 상상에서나마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대단한 쾌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판타지가 거듭된다면 그 쾌감의 중추는 이미 환각에 중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의 출구는 보이지 않고 복수는 멀어져만 가는데, 작품에서만, 영화에서만, 미적 가상의 세계 안에서만 허구적인 정의가 승리하고 복수가 성립한다. 그렇다면 이는 과연 건강한 환상일까, 아니면 현실의 대응력을 무너뜨리는 달콤한 환각일까?

복수극이 어떻게 화끈할 수 있을까? 화끈한 복수극은 미적 가상에 대한 공감의 작용이다. 화끈함은 정서적 효과이지 실질적 변화는 아니다. 화끈하게 복수한다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진짜 현실의 세계가 조금이라도 정화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영화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들은 인물의 삶을 함께 산다. 깊이 동화하고 완전히 몰입해서 결국 인물이 얻는 복수의 쾌감도 내 것인 양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의 ‘그’는 더 이상 그가 아니라 ‘나’이다. 그의 복수를 통해 나의 고통도 해소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깊숙이 몰입한다고 해도, 영화관 바깥의 현실은 영화처럼 두 시간 만에 바뀌지 않는다. 시작은 비슷하지만 결말은 영화와 현실이 늘 어긋난다. 환상이 지나치면 환각이 된다. 환각의 중독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화끈한 복수라는 환각제에 중독된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 달콤한 환각 가운데서 복수의 근육이 위축되고 소실되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