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세상 끝에 선 수컷의 포효

먼저 사과 한다. 수컷이라는 말에 대해. 남성이라는 성적으로 온당한 표현이 있음에도, 수컷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에 사과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엔 남성이라는 세련된 문명의 단어가 아니라 수컷이라는 날 것의 단어가 알맞다. 게다가 시방 그들은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온 것처럼,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 있는 것처럼, “한 발 제겨디딜 곳조차 없”는 절정에 가 있다. 세상의 끝에 위태롭게 서서 울부짖는 두 남자, 영화 <히말라야>와 <대호>의 그들 말이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세상의 끝에서 우리에게 작별을 고한다. 일차원적으로 우선 영화가 끝날 때 두 주인공 모두 한 발 제겨디딜 곳도 없는, 벼랑 끝에서 관객에게 마지막 얼굴을 보여준다. 세상 끝에서 영화가 끝나는 것이다.

<히말라야>의 주인공 엄홍길은 지금 지구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히말라야의 산맥에 있다. 그는 칼바람 속에서, 지키고 싶었지만 지켜내지 못한 “의”의 세계를 포효한다. 다른 남자 <대호>의 주인공 천만덕 역시 지키고 싶었던 산군을 지켜내지 못한 채, 차라리 자진으로써 세계를 불태워버리고자 한다. 자신을 지켜낼 수 없는 세상이라면 소진함으로써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도려내리라는 결기다.


영화 <히말라야>의 한 장면.



한국 영화의 후반기는 무릇 환상의 복수로 넘실댔다. 현실이야 고꾸라지고, 배반하고, 분열하는 상처투성이지만 영화에서는 단합하고, 꾀를 모으고 심지어 자기를 희생해 부정한 세상을 결딴냈다. 의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 현실엔 없지만 영화엔 있었다. 그런데,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비장한 각오로 극장가를 찾아온 영화들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100억원이 훌쩍 넘는 제작비를 들인 대형 상업영화들이 좌절하는 수컷을 데리고 극장가로 왔으니 말이다. 좌절은 비장미로 수식되고, 수컷들이 비통한 눈물로 가슴을 내리친다.

영화 <대호>는 1925년 일제강점기의 한가운데서 시작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래도 1925년이라는 이 과거의 시공간에는 산군이라 불리는 진정한 수컷과 대포로 추앙받는 천만덕과 같은 인물이 존재했다는 설정이다. 그렇다. 신화이다. 천만덕과 산군은 이를테면 서로의 영혼을 읽어내는 신화적 짝으로 존재한다. 천만덕은 자연과 지킬 의리를 알고 최소한의 배려를 실행하며 허락된 것 안에서 만족을 얻는다. 대호 역시 마찬가지이다. 산군 대호는 야만적 괴물이 아니라 선을 지킬 줄 아는 초월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대호는 만덕을 지키고 만덕은 대호를 존중한다. <대호> 가운데서 집채만 한 호랑이와 포수 만덕이 서로 마주 보고 교감하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무척 상징적이다. 그래도 1925년이라는 과거의 공간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존중하는 진짜 수컷들이 있었던 셈이다. 신화라는 게 무엇인가? 신화는 지금, 여기에 없는 그 무엇에 대한 간절한 추억 아니었던가?

이러한 신화적 추억은 <히말라야>에서도 반복된다. <대호>에 있어서 진짜 수컷의 근거가 과거였다면 <히말라야>의 존재 근거는 실화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히말라야>는 고 박무택 대원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불가능한 원정을 떠났던 엄홍길 대장의 이야기이다. <히말라야>가 관객에게 호소하는 것은 일반적인 대중 영화의 결말의 카타르시스와는 사뭇 다르다. 대중 영화의 호흡 가운데서는 목표했던 것이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즉, 시신을 찾기 위해 히말라야에 올랐다면 시신을 되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히말라야>는 결과가 아니라 되찾으러 갔던 그 ‘진심’을 봐달라고 호소한다. 진심이라는 게 무엇인가? 깊은 우정과 연대감을 공유했던 형과 아우 사이의 의리와 우정의 다른 말 아닌가? 산쟁이라고 부르는 그들끼리의 깊은 의리, 그것이 곧 진심 아닌가? 경제적으로도, 명예를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그 무모한 여정을 이끈 동력은 말로 설득할 수 없는 동질감과 공감, 연대감이라고 할 수 있다.

엄홍길 대장과 박무택 간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연대감, 의리와 우정은 대호와 천만덕의 교감과 닮아 있다. 그 희박하고도 희유한 우정, 그런 게 있다는 것을 애써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그 우정과 연대는 성공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만다. 만덕은 대호를 구하지 못하고, 엄홍길 대장은 박무택의 시신을 한국으로 옮겨 오지 못한다. 실패했지만 아름다운 교감은 그렇게 세상 끝의 신화적 시공간 안에 박제된다. 우정과 연대, 말할 수 없는 공감의 기적은 모두 과거, 세상의 끝에 묶여 있다. <히말라야>와 <대호>는 그런 진짜 수컷의 부재증명, 즉 강력한 알리바이로 작용하는 셈이다. 지금 여기엔 없는, 진짜 남자들 말이다.

두 영화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부분은 황정민과 최민식의 오열과 포효의 순간이다. 성취가 아니라 좌절에 관객의 깊은 공감을 담고자 한다. 카메라는 결국 무택을 챙기지 못해 꺼이꺼이 우는 황정민을 클로즈업한다. 아들을 지켜내지 못한 천만덕을 앙각으로 잡아내는 카메라의 시선도 마찬가지이다. 소리 내서 울 때 그들은 더 커지고 중요해진다. 그렇게 뭔가를 잃어서 괴로워하는 진짜 남자들이 영화 속에서도 과거에만 있다. 의리를 알고, 도리를 아는 남자 그러니까 진짜 정의로운 수컷들이 죄다 과거,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패배했지만 행동했다. 인간은 허약하지만 정의는 강하다. 도와 정의를 아는 남자들은 선택하고 행동해왔다. 지금 여기의 인간들은 무행동을 행동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진짜를 아는 남자들이 세상의 끝에서 실패를 선언할 때, 그것이 오래된 예언처럼 여겨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배신과 협잡이 난무하던 세계 끝에 진짜가 나타나길 기다린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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