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내가 너의 아버지다

<스타워즈>의 가장 유명한 대사 중 하나는 바로 “나는 너의 아버지다(I’m your father)”이다. 똑같은 대사가 한국 영화에서 등장한 적이 있는데,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에서 연구자인 아버지(박중훈 역)가 딸을 헬리콥터에 실어 보내면서 이렇게 소리친다. “내가 네 아빠다!”라고 말이다. 같은 말이지만 말의 용법과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문맥이 다르다는 뜻이다.

다스베이더가 내가 네 아버지다라고 말하는 순간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결은 지속된다. 아버지이지만 그를 죽여야만 한다. 그는 우주 최고의 악이기 때문이다. 혈연은 다음의 문제이다. 다크 포스가 곧 악이라면 그것을 없애야 세상에 선이 돌아오고, 윤리가 바로 선다. 루크 스카이워커는 아버지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죽인 게 아니라 악의 축 다스베이더를 죽였다. 이 분리가 없다면 루크 스카이워커는 정신병자가 되거나 패륜아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스타워즈> 시리즈는 아들과 영웅, 아버지와 악을 분리함으로써, 역사의 방향성을 선포했다. 아버지라고 할지라도, 부정한 아버지라면 그를 베어야만 하는 것이다.

살부(殺父)의 서사는 서양문학에서 꽤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이디푸스일 것이다. 차이는 알고 그러느냐 혹은 모르고 그러느냐일 것이다.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방점이 어디에 찍히느냐이다. 비록 아버지일지언정, 부정한 자일 때 아들은 아버지를 밟고 일어서야만 한다. 이 전통은 현대 할리우드 대작 블록버스터의 서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5년 대장정의 끝을 알린 <헝거게임>이나 판타지 대작인 <해리포터>와 같은 서사 안에도 살부는 상징적 은유로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살부는 반드시 생물학적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오래된 관습, 이미 폐해가 짙어진 구습을 철폐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것, 즉 기성세대의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이념을 수립하는 것, 그런 것들이 다 넓은 의미의 살부 서사에 포함되는 것이다.



영화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의 한 장면.


그런 점에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는 그 자체로 살부의식을 치르고 있다. 새롭게 시리즈를 맡게 된 제작자 디즈니와 연출자 J J 에이브럼스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매력은 받아들이되 새로움을 위한 단절을 시도하고 있다. 이야기를 거듭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던 이전 에피소드의 방식을 버린 게 첫 번째이고, 그것을 위해 새로운 인물들을 등장시킨 게 두 번째이다. 방법만으로 보자면 사뭇 잔인할 정도이다.

원작 시리즈의 충실한 팬들에겐 추억의 동창회 같은 기분이기도 했지만 한편 이제는 너무 늙어버린 주인공들을 스크린에서 확인하는 것은 꽤 슬픈 일이기도 하다. 한 솔로가 자신의 우주선 밀레니엄 팔콘 호에 돌아와 “이제야 돌아왔군” 하고 말할 때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늙어버린 한 솔로(해리슨 포드)는 이제 그의 시대가 끝났음을 확인시켜준다. 이 확인은 자쿠의 황량한 사막을 전력 질주하는 레이와 핀의 싱싱한 에너지와도 대비된다. 말하자면, 이제 미래는 그들에게 맡겨야 되겠구나라는 수긍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다스베이더는 선의 편에서 태어났지만 악으로 변심한 인물이다. 아버지가 나쁜 게 아니라 아버지가 나쁘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나쁜 아버지라면 아버지라는 이유로 전폭적으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처벌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아들의 윤리가 확보되고, 아들로서 제자리에 설 수 있다. 아버지라는 이유로 악을 부정하고 감추려 든다면 세상은 다크 포스에 의해 잠식될 뿐이다. <스타워즈>의 동화 같은 세계는 이 자명한 윤리를 반복적으로 설파한다.

우리의 전통 설화 중에는 “효”를 강조한 이야기들이 참 많다. 딸아이가 목숨을 걸고 저승길에 들어가 아버지를 살리는 바리데기 설화부터, 목숨이 위태로운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허벅지살을 도려내 먹였다는 며느리 이야기까지, 미담이라고 알려진 설화들은 어쩐지 자식의 희생을 요구하고, 부모의 절대성을 강조한 것들이 많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즘이야 그마저도 희박해지긴 했지만, 원래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본능이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절로 자식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효”는 이념이다. 그것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반복적인 교육과 강요, 설득과 훈련을 통해 전달되는 후천적 습득의 영역이다.

그런데 이 효의 학습과정에서 우리는 객관적 판단의 힘을 뺄 것을 요구받는다. 하지만 앞선 세대의 말을 비판적으로 뒤집어보는 것 역시 본능이다. 후속 세대는 앞선 세대가 이뤄낸 것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후속 세대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등장해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오멘>과 <엑소시스트>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아이들이 무섭게 돌변해 부모를 겁주거나 부모에게 위해를 가하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훗날 영화학자들은 당시 등장했던 새로운 세대들에 대한 기존 세대의 두려움이 이러한 공포 서사에 반영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이 등장했던 해도 1977년이다. 새로운 세대는 충분히 두려운 존재여야만 한다. “나는 네 아버지다”라고 말하는 게 생존의 이유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 여기에서는 아버지의 말이 곧 법이 되는 듯싶다. 아버지에 대해 생각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생각하지 말라고 무조건 따르라고 압박하는 세상, 지금이 바로 그런 세상인 듯싶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