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고전 처방전

고전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로야,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작품”으로 규정되지만, 고전에 쓰인 ‘옛 고(古)’자 때문인지, 고전 하면 무조건 오래된 작품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런데 고전이야말로 현대적이구나 무릎을 칠 때가 있다. 고전 명작들이 거듭 재탄생하는 것을 볼 때 말이다. 12월에는 언제나 필독서로 추천하는 작품 중 두 개가 새롭게 해석되어 선보인다. 하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이고 다른 하나는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이다.

두 작품은 유명한 고전답게 이미 여러 번 영화화되었다. <마담 보바리>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을 맡았던 1991년 <마담 보바리>이다. 클로드 샤브롤이 연출한 이 작품은 유독 보바리를 혹독하게 그려냈다. 그 대표적 장면이 바로 음독자살을 시도한 보바리가 죽어가는 과정이다.

감독은 자연주의 다큐멘터리처럼 냉소적으로 그녀의 죽음을 담아낸다. 대개 우리가 기대하는 음독자살이란 독약을 마시자마자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는 것이다. 하지만 1991년 <마담 보바리>에서 보바리는 구차하고, 비루하게 침대를 헤매다 가까스로 눈을 감는다. 생명줄이라는 게 생각보다 질긴 것이어서 약간의 연출로 깔끔히 떠나기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이 와중에 남편인 샤를은 아내가 무슨 약을 마셨는지, 왜 죽는지도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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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치고 보바리만큼이나 작가에게 애정을 부여받지 못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이는 비판이 아니라 칭찬이다. 우스꽝스러우리만치 애처롭게 세상을 떠나는 보바리는 플로베르와 샤브롤이 함께 연출해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원작에서도 그녀는 웃다, 울다, 펄쩍 뒤며 날뛰다가 죽는다. 그녀의 죽음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장엄함이 없다. 철저히 그녀는 그렇게, 시시하게 죽어간다.

영화 <마담 보바리>의 한 장면.



2015년 <마담 보바리>의 보바리는 다행히 독약을 먹자마자 쓰러지고 스크린은 암전된다. 그런데 이번엔 그녀의 소비욕이 전경화된다. 여성 감독 소피 바르트는 <마담 보바리>의 다양한 인물 중에서도 특히 뢰르를 주목한다. 부티크 주인인 뢰르는 지루한 시골 생활에 염증을 내는 보바리에게 접근해 소비를 권한다. 그는 독심술사처럼 보바리의 허영을 읽어낸다. 그는 보바리가 듣고 싶어하는 ‘파리’ ‘귀족’과 같은 단어들로 그녀를 건드린다. 삶의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보바리는 뢰르의 유혹에 기꺼이 빠져든다.

2015년의 보바리를 보고 있자면, 그녀를 무너뜨린 것은 확실히 불륜이 아니라 과소비이다. 삶의 허무를 소비로 채우려던 그 헛된 욕망이 그녀를 부셔버린 것이다. 과소비 마담 보바리는 비단 19세기의 과거형 인물형이 아니다. 1990년대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에도, 2000년대 가쿠다 미쓰요의 <종이달>에도 보바리는 등장한다. 삶의 공백을 화려한 겉치레로 봉합하려는 여성들은 19세기 이후 지금, 이곳에도 여전히 문제적이다. 잔인한 것은 마담 보바리의 가장 큰 잘못이 아동학대라는 사실이다. 내내 등장하지 않던 딸 베르트는 마침내 고아가 되어 방직공장으로 보내질 때에야 얼굴을 내민다.

<마담 보바리>가 돈과 허영의 관계를 보여준다면 <맥베스>는 그보다 더 깊숙한 야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질문은 야망이란 밖에서 오는 것이냐 혹은 내재된 것이냐로 압축할 수 있겠다. 즉, 마녀들의 예언 때문에 맥베스는 왕을 시해한 것일까 아니면 마녀들은 그저 맥베스의 야망을 흔들어준 것에 불과한 것일까.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가운데서도 가장 어두운 인간의 내면을 보여준다. 질투나 노화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라면 권력에 대한 야망은 꽤나 제한적인 인간 유형에게나 해당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 <맥베스>를 보고 있노라면, 맥베스를 미치게 한 게 무엇인지가 좀 더 명확히 보인다. 얼핏 그는 덩컨 왕을 죽인 죄책감 때문에 미친 것 같지만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왕위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미쳐버렸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광기는 우연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낸 필연이다. 그는 왕위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들을 잔혹하게 파괴하고, 권력을 지키기 위해 예언을 요구한다.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듣기 위해 마녀들을 다그치고, 악행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를 예언에서 찾으려 억지를 쓴다.

사람은 왜 권력을 쥐게 되면 더 관대해지지 못하고 편협하고 잔인해지는 것일까? 권력의 공포는 계속 가지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맥베스>는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집착이 도착과 광기, 폭력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이클 패스빈더의 연기를 통해 그 집착은 말 그대로 미친 짓, 광기임이 선명해진다. 권력이 공포에 기댈 때의 파국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고 보니, 총선 열기가 벌써 뜨겁다. 선거는 2016년인데 이미 선거철이라도 된 듯 공천이며, 지역구며 세상이 출렁거린다. 공직에 나서거나 선거에 임하는 사람들은 대개 국가와 국민이 자신을 호출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봐야 할 노릇이다. 맥베스처럼 자기가 듣고 싶은 예언을 누군가에게 다그쳐 들었던 것은 아닌지,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야망의 독백을 대중의 지지로 착각한 것은 아닌지 말이다. 고전은 그래서 고전이다. 그러니 고전을 읽는 공인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질 게 분명하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