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획일적 세계에서의 허구와 상상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는 사소하지만 꽤 재미있는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빙리의 저택에 방문했던 언니 제인이 그만 병에 걸려 며칠 더 머물게 되었다. 적극적인 동생 리지는 언니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빙리의 저택에 가려 한다. 가난한 리지의 집에는 여분의 마차가 없다. 하지만 언니가 걱정된 리지는 걸어서라도 가기로 마음먹는다. 울타리를 뛰어넘고, 웅덩이를 건너 흙투성이 길을 5㎞나 걸어 빙리의 저택에 도착한다. 당연히 엉망이다. 양말도 더러워지고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모습으로 조찬실에 들어가자, 빙리의 여동생들은 그녀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째려본다.

또 이런 장면도 있다. 손필드 저택에 그와의 결혼을 염두에 둔 잉그램 모녀가 찾아온다. 미혼의 제인 에어가 손필드에 머무는 것을 성가시게 여긴 두 모녀는 가정 교사를 험담하기 시작한다. 모든 가정 교사들은 밉상이고 주책바가지들이며 마귀처럼 음란하다고 비난한다. 제인에게 은근히 곁눈질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낙인 찍는다. “저 여자의 얼굴에는 그 부류의 인간의 결점이 빼놓지 않고 쓰여 있어요.” 1847년 출간된 샬럿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의 한 구절이다.

리지의 젖은 드레스를 경멸하는 빙리 자매, 제인을 험담하는 잉그램 모녀, 그들은 말하자면 19세기의 갑이다. 그녀들은 많은 상속 지분을 가진, 고귀한 신분의 여성들이었다. 부유했고, 안전했으며, 평생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예쁘게 자라나 젠트리 신분의 남성과 결혼해 상속 지분을 평생 쓰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그녀들의 삶이자 미래였다. 반면, 우리의 주인공인 리지나 제인은 ‘을’ 중에서도 을이었다. 딸 부잣집 가난뱅이거나 고아였으니 말이다.

만약, 역사책이었다면 제인이나 리지는 기록될 가능성이 없다. 심지어 ‘갑’에 속했던 혜택 받은 여성들조차도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못하는 마당에 빈곤하고, 힘도 없는 ‘을’ 여성들이 역사에 남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이 있었기에 그녀들은 자신의 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 제인과 리지를 멸시했던 그녀들, 당시 이데올로기적 혜택을 받은 그녀들은 문학 속에서만큼은 아주 작은 비중의 역할로 축소된다. 심지어 생각 없는 철부지나 무례한 여자들로 비난받는다.


역사에서는 그들이 승자였을지 몰라도 문학에서만큼은 패자가 주인공이 된다. 즉, 문학은 역사가 패자라고 호명한 자들을 불러 내 그들을 주인공의 자리에 앉히고, 실패의 역설을 들려준다. 문학에는 실패자의 자리가 있다. 주인공의 목소리를 빼앗을 권리가 문학에서만큼은 사라지는 것이다.

역사 아니 엄밀히 말해 역사의 기록은 공정하지 않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만 봐도 알 수 있다. 하나의 관점이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에는 이면이나 다양성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통제가 답이라고 보는 이들에겐 역사란 승자의 몫이다. 승자는 단수이다. 그러니 다양한 목소리를 담는다는 것 자체가 권력에 대한 모독이며 월권이다.

하지만, 문학만큼은 예외적인 치외법권 지역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문학은 곧 예술의 자유이다. 즉 예술에서만큼은 역사나 기록이 거부하는 다양한 상상력을 담을 수 있다. 그 어떤 권력자도 예술의 게토에 권력의 깃발을 꽂으려 해서는 안 된다. 예술에서는 빙리의 여동생들이 비판받아 마땅하고 잉그램 모녀의 잔인한 무지가 비난받아야 한다. 그게 바로 예술의 정의이며 문학의 도리이다.

그런데, 점점 두려워진다. 영화 <암살>에서 조승우가 맡은 김원봉은 그저 카메오에 불과했지만 이야기 전반에 탄력을 준다. 역설적이게도 공식 캐스팅이라고 할 수 없는, 그 김원봉으로부터 지령은 시작되고 행동은 전개된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이 허구에 힘을 실어 준다. 이야기는 이렇듯 매력적인 활동가에 의해 추진된다. 가속도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 대해 단 하나의 관점을 요구받는다는 것은 즉, 김원봉은 선인이거나 혹은 악인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적어도 <암살>을 관람하는 관객에게 김원봉은 선인이다. 왜냐하면 그는 조국을 지키고자 했으며 임시정부의 존재를 테러로 알리고자 했고, 조국의 새로운 재건을 꿈꿨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어떤 관점이 정답이 된다면, 가령, 월북한 자는 모두 공산주의자이니 악이다, 라는 관점이 생긴다면 그는 그저 악인이 될 뿐이다. 교과서에 월북한 자는 모두 공산주의자요라고 그러니 대한민국의 주적이다, 라고 쓰인다면 우리는 그 옛날처럼 백석이나 이태준을 읽을 수 없고, <암살>도 볼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이런 걱정도 앞선다. 비록 현실에선 개미처럼 작고, 나약한 서민이지만 영화에서만큼은 조태오 정도의 거물급 재벌 3세를 혼쭐낼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경제를 이 정도로 일군 산업역군을 호도한다며 갑의 논리가 허구의 영역까지 넘보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교과서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획일성의 끝은 어디일까? 어쩌면 세상에 단 하나의 언어만 유통되는 세상,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고 우려스럽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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